쳇바퀴 도는 여행도 좋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한 해, 두 해, 여러 해 갈아치우면서 여전히 어제는 오늘로, 오늘은 내일로 빠르게 흘러간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래서 소중한 일상의 하루처럼, 치앙마이에서 맞은 서른 번의 하루 그리고 열 개의 이야기.
↑ 치앙마이에서의 숙소 |
#1 걸어서 도심까지
‘수수료 220바트(한화 약 8000원)’ 안내문구를 보곤 ATM기기 화면에서 곧장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이전에도 이와 동일한 상황에 놓였던 것 같은 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생각해보니 이건 데자뷔가 아니라 실수의 반복일 뿐이다. 지난번 태국여행 때 현지 물가 대비 비싼 수수료에 놀랐던 게 그제서야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이곳 로컬식당에서 한끼 식사값이 40~50바트(약 1800원) 정도하니, 다섯 끼를 ATM기기에 헌납하는 꼴이다. 어차피 수중에 현금이 없는 이상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한 번은 헌납을 해야겠지만 무조건 한번에 끝내야 한다. 그러려면 멀쩡한 정신과 철저한 예산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돈 한 푼 없으니 우선 당장의 계획은 버스 대신 두 발로 숙소가 위치한 도심에 닿는 일이었다. 인천공항을 생각하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치앙마이공항은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3~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걸어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라니 수수료에 놀란 가슴이 거리를 확인하고 또 한번 놀란다. 공항에서부터 두 발 꾹꾹 눌러 오직 내 힘 들여 스스로 도시로 나아가는 행위는 여행자에게 축복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발자국의 속도에 맞춰 도시의 인상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길을 지나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한데 뒤섞여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한 이곳의 도로사정을 맞닥뜨리고 나자 그새 올드타운이 코앞이다.
↑ 공항에서 도보로 숙소까지 이동했다. |
#2 예를 갖춘 소박한 집
“아직 방 청소 중이라 죄송합니다. 아래 마당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거의 끝나갑니다.” 숙소 주인 핌은 청소가 끝난 방을 보여주면서도 재차 사과의 뜻을 표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은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서 여행자와 주인의 생각이 같을 리 만무하다. 여러 번 사과하는 핌의 인상이 단숨에 숙소의 인상을 높여주었다. 핌은 청소와 안내가 끝나자 다른 일정이 있다며 숙소를 떠났다. 텅 빈 집엔 여행자 홀로 남았다. 2층 숙소는 옛 주택을 개조해 만든 소박한 숙박시설이다. 숙소라기보단 현지인 집에 놀러 온 것 같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실제 모습이 훨씬 멋들어진, 로컬 냄새가 마구 풍기는 집이다.
방이라곤 1층에 한 개, 2층에 두 개, 총 3개뿐이다. 이 집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핌이 운영하는 숙소가 하나 더 있다. 핌이 황급히 자리를 뜬 건 그곳에도 청소할 방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1층 방에 장기간 머무르고 있는 조, 피에르 커플과 인사를 나눴을 때 첫만남치곤 대화가 길어졌다. 핌과 핌을 열받게 한 사람들이 대화의 중심에 있었다. “글쎄, 그 방에 묵은 여행자 두 명이 아침에 체크아웃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거예요. 핌이 와서 방문을 수차례 두드렸더니 그제야 잠에서 깬 거 있죠. 새벽까지 술 마신 걸 핑계대면서 그들이 너무 당당하게 하룻밤 더 묵겠다고 떼를 쓰는 거예요. 핌은 당연히 화를 냈죠. 웃긴 건 그들이 핌한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 동남아시아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간혹 자신이 무슨 왕이라도 된 것마냥 행동하는 서양인 여행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딱 그랬어요. 환경이 달라졌다고 예의가 달라지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 숙소 사진 및 캐나다에서 온 하우스 메이트 조(Jo)(중간 사진) |
조의 말마따나 자유로이 떠나온 여행이라고, 자유를 품은 여행자라고 해서 예의를 잃어서야 되겠나. 예를 갖춘 핌의 마음가짐이 곳곳에 묻어난 이 집에서 특히, 햇볕 잘 드는 뜰과 마당은 이곳에 온 첫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를 지켰다.
#3 작고도 거대한 불교사원
사원을 출퇴근하듯 드나들었다. 올드타운 도심의 왓 프라싱(Wat Phra Singh), 왓 쩨디 루앙(Wat Chedi Luang Varavihara) 사원은 거의 매일 산책하듯 방문했고, 올드타운 밖의 왓 우몽(Wat Umong), 왓 쑤언덕(Wat Suan Dok) 사원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나들이처럼 즐겼다. 1296년 멩라이(Meng rai) 왕은 치앙마이를 세우고 란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당시 치앙마이는 문화와 경제, 불교의 중심지. 하지만 주변 나라의 계속되는 위협과 침략으로 인해 5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란나 왕국은 쇠락했다. 이 도시에 수많은 사원이 자리한 건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 (맨 위 좌측, 중간 사진)왓 쑤언덕 사원 (마지막 사진)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 |
그중 ‘왓 프라탓 도이수텝(Wat Phrathat Doi Suthep)’은 치앙마이와 란나 왕국을 상징하는 대표 사원으로 꼽힌다.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높이 1677m 도이산 중턱에 사원이 자리한다. 1383년에 세워진 이 사원은 부처님의 어깨뼈 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해서 관광객은 물론 태국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사원이 자리한 곳까지 숨을 헉헉대며 300개의 긴 계단을 오르고 나면 이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시가지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발 아래 도시가 한없이 작고도 거대하다. 이 날도 변함없이 저 아래 도시의 하루가 피고 지고 있었다.
#4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잘 잤어요? 간밤에 춥지 않았어요?” 두터운 겨울용 스웨터로 무장한 채 마당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던 조와 피에르가 아침인사를 건넸다. 치앙마이에서의 12월은 일년 중 겨울에 해당하지만 평균 최저 기온이 15.7도로 한국사람에겐 초가을의 이상적인 기온일 뿐이다. 하지만 간밤은 달랐다. 조와 피에르처럼 한기가 느껴져 몇 번이고 잠에서 깼다. 그 이후 며칠 동안 밤 기온은 예년과 다르게 뚝 떨어졌고, 태국에서 한국의 온돌방을 그리워하게 될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기온 급강하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뉴스를 핌을 통해 전해 들었다. 대다수 태국 주택에 난방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데다 현지인들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사망자 수가 급증했다는 것이 핌의 설명이었다.
↑ 벼룩시장 사진들 |
강추위에 대비해 조가 입은 스웨터도 사고 구경도 할 겸 벼룩시장을 찾았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올드타운에서 북쪽으로 7㎞ 지점까지 냅다 달렸다. 금세 온몸이 땀 범벅이다. 간밤에 닥친 추위가 거짓말처럼 한낮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조의 설명대로 경찰서를 지나치자 길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외진 공원 같은 장소에 주말에만 문을 여는 벼룩시장에 닿았다. ‘벼룩시장’ 자체가 이 시장의 이름이다. 서울의 황학동이나 동묘시장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옷과 신발, 가방 등의 일상 아이템에서부터 오래된 TV나 카메라, 전화기, 시계 등의 빈티지 골동품이 쫙 깔려 있다. 보물찾기 놀이가 따로 없다. 조가 입은 겨울용 스웨터는 찾지 못했지만 계획에 없던 다른 보물을 여럿 손에 넣었다.
#5 매일의 점심식사
자전거를 타고 올드타운을 벗어난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점심은 한 곳의 식당에서 해결했다. 다른 식당에서 로컬음식을 먹으면 성에 차지 않아 맛과 가격 면에서 꼭 이곳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을 정도다. 범룽 부리 1가(Bumrung Buri 1 Alley)에 위치한 ‘2C’s2son’s’가 식당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식당을 추천해준 것도 조와 피에르였다. 이곳은 그들의 오랜 단골식당이다. 두어 개의 테이블뿐인 작고 좁은 식당이지만 맛은 규모와 반비례한다. 파파야 샐러드와 그린 커리, 팟타야, 모닝글로리 볶음 등 추천메뉴가 차고 넘친다. 단 커피는 예외다. 이곳의 메뉴만 보면 식당과 카페 둘 다 완벽하게 구성해놓은 것 같지만 커피 맛을 보고 나면 아무리 아끼는 장소여도 카페에 힘을 싣긴 어려워진다.
↑ (맨위 사진)범룽 부리 1가(Bumrung Buri 1 Alley)에 위치한 ‘2C’s2son’s’에서 매일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아래) 와라이 보행자 거리(Wua Lai Rd)의 야시장 |
#6 하루의 마무리는 야시장에서
2C’s2son’s과 같은 대다수의 로컬식당은 점심장사가 마무리되는 오후 3~4시면 문을 닫는다. 올드타운 여러 곳에서 일몰과 함께 야시장이 문을 열기 때문에 이들과 상도덕을 지키기 위한 암묵적인 약속인 건지 아니면 저녁까지 식당 문을 열어봤자 손님을 모조리 야시장에 빼앗길 게 뻔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매일 저녁 불을 환하게 밝히는 많은 노점상들로 와라이 보행자 거리(Wua Lai Rd)엔 여행자는 물론 현지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곳에서 거의 날마다 카오쏘이를 먹었다. ‘카오쏘이’는 태국북부 대표 음식 중 하나로, 진한 커리 베이스에 닭고기나 소고기, 코코넛 밀크를 넣어 끓인 걸쭉한 육수가 핵심이다. 여기에 튀긴 에그누들이 첨가되어 나온다. 튀긴 에그누들 대신 에그누들이나 넓게 자른 쌀국수 면을 삶아서 넣는 경우도 있는데, 치앙마이에선 튀긴 에그누들이 보편적인 레시피로 통한다. 걸쭉한 육수와 기름으로 코팅된 에그누들의 합이 치앙마이의 맛을 이룬다.
↑ 그랜드 캐년 워터파크 |
#7 그랜드 캐년 나들이
그랜드 캐년 워터파크는 이곳 현지인들이 주말 가족나들이로 택하는 인기장소 중 하나다. 차를 타고 올드타운에서 남쪽으로 20여㎞ 달리면 태국북부 유일의 야외 워터파크가 나름의 위용을 과시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해류의 침식작용에 의해 높은 절벽 능선이 조성된 이곳은 수심 50m가 넘는 초록빛 풀로 둘러싸여 있다. 자이언트 슬라이더, 플로팅 트램폴린, 웨이크보드, 카약 등의 액티비티와 수상 스포츠가 그랜드 캐년 모험의 핵심이다. 여느 워터파크와 견준다면 시설 면에서 최상의 조건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하루 반나절 콧바람 쐬며 피크닉 기분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8 만남의 장소, 란라오 책방
숙소가 올드타운에 있었던 터라 치앙마이의 가로수길이라 불리는 님만해민(Nimman Haemin)까지 도보로 자주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님만해민에 크게 마음이 이끌렸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자전거를 빌려 왓 쑤언덕 사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서쪽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지점에서 님만해민 거리를 맞닥뜨렸다. 1㎞ 남짓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에는 듣던 대로 트렌디한 카페와 상점, 음식점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거리의 랜드마크처럼 세워져 있는 원님만(One Nimman) 쇼핑몰과 인접한 곳에서 란라오(Ranlao) 책방을 만났다. 이후 님만해민을 자주 찾은 건 오직 이 책방 때문이었다.
↑ 치앙마이의 가로수길로 불리는 님만해민(Nimman Haemin)거리에 위치한 란라오(Ranlao) 책방 |
2000년대 초 문을 연 란라오 책방은 님만해민이 트렌드 거리로 주목받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서 터를 닦고 자리를 지켜왔다. 치앙마이의 유명 작가들은 물론 지역의 NGO노동자와 예술가 등을 이어주는 만남의 장소로 오랜 시간 역할을 해왔다. 크고 작은 행사를 통해 작가와 독자의 만남의 장소로도 예나 지금이나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독립서적에서부터 문학과 논픽션, 단편소설, 역사와 종교, 철학, 심리학에 관한 책까지 다방면의 서적이 꽂혀 있는 책장 한가운데 태국어로 번역된 한국의 유명 베스트셀러 서적이 인기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서적도 꽤 눈에 띈다.
#9 리얼 타이 마사지
그림과 글씨로 ‘마사지’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보고 들어갔는데 웬걸, 사원이었다. 한번 더 현수막을 확인하고서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고개를 집어넣으니 눈에 들어온 건 정확히 마사지다. 넓디 넓은 마루바닥에 얇디 얇은 매트리스를 깔고 드러누운 사람만 족히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마사지사의 수는 이를 웃돈다. 이곳의 명칭은 왓 판 웬 타이 마사지(Wat Pan Whaen Thai Massage), 독특하게도 사원 안에 자리한 마사지 숍이다.
안내데스크에 앉은 여성으로부터 메뉴판을 건네 받았는데 현수막에 붙어 있던 가격표와 일치했다. 한 시간 기본 마사지가 150바트(한화 약 6000원), 호객용 가격이라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매트리스가 만석이라 30여 분 기다린 후 마사지를 받고선 내내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리얼 타이 마사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현수막 문구도 진짜였다. 이로서 출퇴근 장소가 하나 더 추가됐다.
↑ (맨 위 사진)사원 안에 자리한 왓 판 웬 타이 마사지(Wat Pan Whaen Thai Massage) (아래)농 부악 핫 공원(Nong Buak Haad Public Park) |
#10 매일같이 공원산책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공원 가까운 곳에 살고 싶은 바람을 여기서 이뤄본다. 핌의 집을 택할 때 ‘파크세권’까지 살핀 건 아니었는데, 와서 보니 운이 좋았다. 걸어서 3분이면 초록빛 공원에 닿는다. 연못, 다리, 무성한 화단, 분수, 넓은 잔디밭으로 아름답게 조성된 농 부악 핫 공원(Nong Buak Haad Public Park)에서 거의 매일 산책으로 아침을 맞았다.
운동 나온 현지인들 사이에서 잊고 있던 일상의 분주함을 덩달아 같이 느꼈다. 이들과의 호흡이 끝나면 한가로이 요가나 산책을 하는 외국인 여행자를 보면서 곧장 여유를 고쳐 입기도 했다. 한낮에는 잔디 위에 털썩 드러누워 해가 내리쬐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일광욕을 즐겼다. 어느 하루는 공원에서 진행된 요가모임에도 참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과 교류도 나눴다.
↑ 매일 같이 공원 산책을 했다. |
여러 해 인생의 시간이 반복되고 쌓여 가면 살아가는 행위가 조금은 쉬워질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 여행이라고 쉬우랴. 쳇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나 머무른 태국북부에서의 한 달은 결과적으로 쳇바퀴 도는 여행을 선물해줬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0호(23.3.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