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봄, 한 회계법인 소속 김모 회계사(가명)는 B기업의 외부감사팀에 새로이 합류했다. 그리고 B기업의 2015년 사업보고서 적정 여부 검토에 나섰고 현장 실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계정의 잔액에 의문이 생겼고 B기업의 재무팀 과장에게 증빙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 씨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증빙자료가 아닌 "건방지다"는 핀잔 뿐이었다. 김 씨는 "새 업종을 맡다보니 지적 받을 만한 사안들이 있었고 그에 대해 정당하게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재무팀은 갖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자료 제출을 미뤘고 결국 감사보고서 제출 기한까지도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재무팀은 김씨와 김씨 상사를 불러 "재계약 안 하고 싶냐? 회계법인은 우리(기업)가 지시하고 보라는 것만 검토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냐? 내년 감사 보수 인상은 절대로 없다"고 윽박질렀다. 김씨는 "기업 재무팀은 '슈퍼갑'이고 외부감사를 진행하는 외부감사인은 슈퍼갑의 눈치만 보는 '을(乙)도 아닌 병(丙)'의 신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업들이 외부감사인과 감사계약을 맺는 매년 3~4월이면 큰' 장(場)'이 열린다. 기업들이 입맛에 맞는 회계법인을 쇼핑하는 시간이다. 상장사의 경우 외부감사인과 계약기간은 3년이다. 이에 계약기업이 한 곳이라도 줄까봐 회계법인 파트너들은 감사 과정에 불만을 털어놓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재계약' 청탁에 매달린다. 다른 회계법인 소속 이모 회계사는 "말 그대로 계약 시즌에는 전년 감사 결과가 제대로 이뤄졌는지가 아니라 기업들의 심기를 거슬렸는지를 더 걱정하게 된다"며 "우리나라 기업들의 외부 감사 현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회계법인의 굽신거리가 경연장"이라고 꼬집었다. 재계약과 함께 회계법인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기업이 매년 갱신하는 외부감사 보수가 거론된다. 이씨는 "외부 감사 과정에 대한 기업들의 비위를 안 건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기업과 매년 다시 협상을 진행하는 감사보수 인상 여부 때문"이라며 "기업이 감사 보수를 물가상승률 수준까지는 올려줘야 회계법인이 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과 회계법인은 소위 '갑·병' 관계로 묶여 있다. 그 원인에 대해 한 회계학 교수는 "소유와 경영이 대부분 미분리된 국내 환경에서 기업이 감사인을 자유롭게 선임하는 자유선임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회계투명성 점수를 낮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갑·병' 관계는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뚜렷히 드러난다. 최근 한국회계학회가 금융당국의 용역을 받아 작성한 '회계투명성 향상을 위해 회계제도 개선방안'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4대 회계법인 회계사 72명 중 93%가 ‘감사 증거를 적시에 제공받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60% 가량의 회계사는 감사인 교체 압력을 받거나 감사보수 인하 요구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설문에 참여한 한 회계사는 "재무제표 작성은 기업이 해야하는 업무인데도 감사인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회계사도 "회계감사를 들어가면 기업의 비위를 맞추느라 자료 요구조차 구걸하는 식으로 한다"며 "그나마 제공받은 자료에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어도 그냥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보니 경제규모 10위권의 우리나라의 회계투명성 점수는 세계 꼴찌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회계 투명성은 조사 대상 국가 61개국 중 61위로 꼴찌를 기록했다. 최근 5년간 순위도 모두 바닥권에 머물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은 금융당국, 일부 국회의원들이 회계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점이다. 이에 맞춰 금융당국은 최근 자유선임제를 줄이는 대신 기업이 감사인을 정부 등으로부터 지정받게 하는 지정감사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골자로 한 회계제도 개혁안을 발표했다. 정부의 개혁안은 2년이란 유예기간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개혁안의 '골든타임'에 주목하고 있다. 법 시행이 최대한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학계, 정치권, 회계업계 등에서는 이번 회계제도 개혁안 시행이 시기적으로 너무 늦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김갑순 동국대 교수는 "회계투명성 문제가 시간적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처리할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애초에 기대했던 회계제도 개선 대책보다 후퇴할까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대우조선 사태로 회계제도 문제에 관심이 커진 지금이 제도 개혁의 적기"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회계제도가 크게 바뀌는만큼 기업과 회계법인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회계제도 개혁안이 외감법 등 법 개정 사안이기 때문에 국회 통과도 큰 과제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국회는 향후
[전경운 기자 / 박윤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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