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흑인 게토에 자리잡은 공동주택의 어느 방안. 흑인과 백인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조깅 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중년 백인과 상의를 의자에 걸친 흑인. 탁자 위에는 성경과 신문만 놓여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래 교수 선생, 내가 선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흑인), "왜 댁이 뭔가를 해야 하는 겁니까?”(백인), "말했잖소. 내가 이런 게 아니라고. 오늘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만 해도 선생은 내 계획에 있지도 않았어. 그런데 지금 여기 이렇게 와 있잖소.”(흑인)
사연인 즉 이렇다. '선셋 리미티드'는 뉴욕에서 LA까지 시속 130㎞로 달리는 급행열차다. 정차하지 않고 역을 통과하는 이 열차에 뛰어든 백인 교수를 흑인 교수가 구해내 자신의 집으로 끌고 온 것이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코맥 매카시(81)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문학동네)가 번역 출간됐다. 두 남자가 마주한 공간으로 다짜고짜 독자를 초대하는 소설이다. 형식이 색다르다. '극 형식'을 취해 처음부터 끝까지 방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만이 이어진다. 대표작 '더 로드'와 형제 같은 이 소설을 통해 그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선생이 어딜 가든 같이 갈거요”라고 붙잡는 흑인과 "댁은 나하고 같이 못 갑니다”라고 답하는 백인의 대화는 송곳처럼 날카롭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압박과 긴장을 더해간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극히 대조적이다. 백인은 4000여권의 책을 읽어온 대학 교수고, 흑인은 살인 전과가 있는 목사. 아들 둘은 죽었고, 철창에 들어가있는 동안 계산을 연습해 어떤 숫자가 주어져도 순식간에 곱셈을 해낸다. 백인은 친구가 없고, 우울증도 앓았다. 신앙과도 같았던 책과 음악과 예술 같은 서구 문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막 깨달은 참이다. 삶이 무력해지자 자신의 생일에 열차에 뛰어들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백인은 삶이 죽음보다 더한 악몽임을 증언하고, 교도소에서 칼을 맞고 죽음의 문턱을 넘은 경험을 한 흑인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다.
"나는 어둠을 갈망합니다. 죽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진짜 죽음을.”(백인), "생각에 신의 향기가 배어 있지 않으면 나는 관심이 없어.”(흑인)
두 사람 사이에 내내 겉돌고 반복되는 대화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케 한다. 실내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방'이 은유하는 것은 '세상'이다. '폭력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답게 이번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한 인간의 숙명을 그린다. 고통스럽지만 묵직한 여운을 남기면서.
출간 이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랐고, 2011년에는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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