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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문학동네)이 10권으로 출간됐다. 직접 한국 문학사의 뼈대가 될만한 101편의 단편을 고르고, 주관적인 해설을 덧붙였다. 2011년 11월부터 2014년 11월까지 인터넷 카페에 연재한 글이다. 염상섭 채만식 현진건 등의 근대작가부터 신경숙 김영하 김애란 등 쟁쟁한 현역작가까지 아우르는 이 선집의 머리말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근현대문학의 강인한 힘을 새삼 확인했다. 그들은 동구 밖의 돌담이나 정자나무처럼 풍상 속에서 무너지고 꺾이기도 하면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29일 홍대 까페꼼마 2페이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비교적 이른 1962년에 문단에 나왔기 때문에 선배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기행이나 일화도 많이 실었다. 가물가물하면 전화로 확인도 하고 자료도 뒤졌다”고 했다. 반세기동안 문단의 영욕을 함께한 그는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증언하는데 특별히 공을 들였다. '황석영의 한국문학사'를 다시 쓴 셈이다.
"단편소설을 정리했지만 다시 보니 이 땅에서 100년간 살아온 민초들의 일상이구나 싶었어요. 소설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편린들이 모여서, 하나의 풍속사-문화사-사회사가 저절로 형성이 되니까. 1권부터 10권까지 읽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나 파악할 수 있을겁니다.”
유명한 작품보단 한 작가의 최전성기때 작품을 골랐다. 그렇게 고른 자신의 작품도 20대에 쓴 '몰개월의 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전집의 3분의 1(31편)을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할애한 점이다. "저는 10여년 이상 한국 문단을 떠나있었고, 그 사이 새로운 작가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번 작업을 계기로 젊은피를 수혈 받은 느낌입니다. 덕분에 내 만년 문학을 탄탄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황구라'의 문단비사가 흘러나오면서 편집자들은 고충이 많았다. 문단이 기록한 작가들의 연표와 황석영의 글이 다루는 연도와 시간에 오차가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편집자들은 밤낮없이 전화와 메일을 보내왔고, 3개월을 꼬박 매달려 사실을 바로잡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작가들의 개인사와 연표까지도 이번 작업을 통해 완전히 정리가 됐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황석영의 문학사'는 국문학자들과 시작점이 다르다. 첫 자리에 의례히 놓이는 이광수가 아니라 염상섭의 '전화'(1925)를 놓았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근대적 자아의 탄생은 1919년 3·1운동을 전후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 그 이전은 근대적 자아가 생기기 전이라고 본거죠. 서구의 경우도 1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20세기가 시작된다고 봤으니까. 1914년에 러시아혁명이 있었고, 우리도 1920년대에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됐으니까요.”
왜 단편 소설이었을까. "우리 작가들은 오랫동안 단편에서 시작해서 장편으로 나아갔으니까요. 한국에선 오랫동안 여건상 장편 소설을 쓰기도 쉽지 않았고 60~70년대만해도 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은 대중문화라는 편견이 문단에 지배적으로 있었으니까. 한작가가 자기 역량을 키우고 자기의 기교나 형식에 대한 연습을 촘촘히 해나갈수 있는 기초는 늘 단편소설이었죠.”
그는 거듭해서 "우리 문학이 정말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문학이다”고 말했다. "식민지시대부터 현재까지 읽어내려오다보면 한국문학은 결국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과 더불어 자기의 삶의 현실과 조건에 민감하기 반응해왔던 문학이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지나온 뒤에도, 우리에게는 80년대 광주도 있고, 민주화도 있었어요. 90년대 막바지에 IMF가 터졌죠. 그러면서 다시 현실의 어려운 파도가 밀려왔어요. 이게 위태로운 일상으로 나타났죠. 이 과정이 50~60년대를 다루는 과정과 아주 비슷한게 있습니다. 2000년대에 오면서 다시 현실과 마주하면서 서사가 화려하게 만개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글이 '너에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한국소설에 앞으로 서사에 큰 변화를 줄 만한 일이 또 있었죠.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그래서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3년간 다시 과거의 소설을 되짚어보면서 새로운 발견도 했다. 이를테면 황순원이다. 그는 "'모든 영광은'은 작가의 체험을 그대로 담은 소설이다. 서울 수복이후 술집에서 만난 어떤 남자를 통해서 좌우이념로 나뉜 상처가 어떻게 남아있는가를 일기형식으로 담아냈는데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이 위기다, 안 읽인다는 문제 제기를 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는 "'한류'만 얘기하는데, 한국문학도 해외에 놀라움을 주고 있다. 조그만 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작품이 나온다고 놀라워한다”고 반박했다.
"프랑스에서 대담을 했는데, 한국문학의 위치는 유럽으로 따지면 뭐냐고 묻더라구요. 독일 프랑스 영국이 아니라 아일랜드 문학과 같다고 설명했어요. 19~20세기 유럽문학의 굉장히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닮았으니까요. 그러니 모두가 이해를 해주더라구요.”
그는 "한국문학은 늘 위기였고 그걸 뚫고 넘어서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서 "유홍준 선생도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사랑을 좀 더 해달라”고 말했다.
해묵은 숙제를 마쳤으니 그는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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