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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과 음주가 무한 반복되는 청춘의 허무함을 이토록 경쾌하게 포착한 감독이 궁금했다. 최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이병헌 감독(35)을 만났다. 배우 이병헌과 일면식도 없다는 그는 “20대의 절반을 ‘잉여’로 보냈다. 그래도 소중한 게 청춘”이라면서 “이 영화를 보고 나이 상관없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스무살때 그는 지방 대학교의 국제통상학과를 다녔다. 졸업장이나 따려고 간 대학은 애초 흥미가 없었다. 군 제대 후 5년간 ‘프리터’로 지냈다. 출장 부페, 전단지 배포, 주유소 알바 등 안해본 잡역이 없다. 용달차를 끌고 양말장사도 했다.
“그 시기엔 항상 불안했어요. 술 마셔도 답답했죠. 뭐라도 할 줄 아는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술 자리에서 남들 웃기는 재능 하나는 타고났다. “너한텐 공기도 아깝다”며 친구들과 낄낄거렸다. 웃음이 터질 때마다 그 말을 메모해뒀다. 어느 날 술값이나 벌겸 시나리오 공모전에 지원했다. 시나리오 작법책을 본 적도 없는 그는 술자리 메모를 참고해서 써내려갔다. ‘날 것’ 의 작품은 덜컥 당선됐다.
“‘구라’는 좀 잘 쳤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교과서 귀퉁이에 ‘야설’을 끄적였는데, 나중엔 (애들이 하도 돌려봐서)책이 너덜너덜해졌어요. 술마시며 갈고 닦은 입담을 대사로 풀었죠.”
내친 김에 여러 작품 썼는데 5편이 제작사에 팔렸다. ‘스물’, ‘네버엔딩 스토리’, ‘오늘의 연애’는 이때 나온 각본이다.
그는 강형철 감독이 연출한 ‘과속 스캔들’, ‘써니’의 각색도 했다. 똑같은 장면을 주고 10여개 버전으로 새로 쓰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때 많은 훈련이 됐죠. 시나리오 작법, 대사의 리듬, 연출의 흐름 등을 몸으로 익혔어요. ‘써니’때 스크립터를 맡아 강 감독님 옆에 붙어있었어요. 연출을 어깨 너머로 배웠죠.”
2013년엔 처음으로 연출한 ‘힘내세요 병헌씨’를 공개했다. 솔직한 대사와 B급 유머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호평받았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연출의 다리가 됐다.
“‘스물’은 10년전 팔렸어요. 그런데 재작년에 다시 저에게 돌아왔죠. ‘힘내세요 병헌씨’(독립영화)를 보고 나서, ‘스물’ 판권을 갖고 있던 제작사 대표님이 찾아와서 연출을 제안했죠.”
이 감독은 충무로에 몇 안되는 ‘젊고 잘생긴 감독’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세 배우와 함께 무대인사를 가면 “주연 배우가 네명이냐”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어렸을 때 별명이 우지원, 성진우였다고.
“그래도 배우하기엔 애매하죠.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이제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충무로 유망주로 떠오른 그에게 요즘 젊은 친구들을 향한 조언을 부탁하자
“저도 우연히 발견한 거여서 해줄 말이 없어요. 뭘 좋아할지 모르니 경험의 기회를 닫지 마세요. ‘삽질’해도 괜찮아요. 스무살은 뭘 해도 용서가 되고 귀엽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은 신뢰가 갔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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