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너무나 순수하고 처절해서 더욱 슬펐던 젊은 베르테르의 순애보가 또 다시 시작됐다. 어느덧 15년 주년을 맞이한 뮤지컬 ‘베르테르’의 아름다운 선율은 여전한 가운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더욱 서정적으로 돌아왔다.
명작으로 불리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 위로 올린 ‘베르테르’는 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문학적인 감성이 풍부한 베르테르는 거리의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인형극을 펼치고 있는 생기발랄한 로테에게 첫눈에 반한다. 문학적인 감성이 같았던 롯데와 베르테르는 마치 오래전 알고 지냈던 친구마냥 가까워진다. 하지만 롯데에게는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었고, 이를 알게 된 베르테르는 사랑을 포기하고 발하임을 떠난다. 하지만 이후에도 롯데를 잊지 못하던 베르테르는 다시 발하임으로 돌아오고, 롯데에게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롯데에게 거절당한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권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베르테르’의 슬픈 순애보는 노란 해바라기가 마지막을 알린다.
베르테르가 사랑과 절망을 느끼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꽃의 마을 발하임이다. 무대 위 구현된 발하임은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마을의 정을 느낄 수 있도록 군더더기가 없다.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만들어진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와 ‘꽃’이라는 상징적인 소품이 채운다. ‘베르테르’의 엔딩신에서 등장하는 노란 해바라기는 베르테르의 사랑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매개체로 사용된다. ‘베르테르’에는 꽃 외에도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물건이 있는데, 바로 롯데와 그녀의 시녀 캐시가 인형극을 펼칠 때 사용됐던 오토마타 장치이다. ‘베르테르’의 운명을 ‘자석 섬 이야기’ 속의 왕자로 표현한 인형극은 오토마타를 통해 더욱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베르테르’의 소품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노주연 소품 디자이너와 만나 극중 소품과 관련된 이야기와 작업에 대해 들어보았다.
◇ 소품 디자인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공연의 맛’
무대디자인과 세트가 큰 그림을 그린다면, 소품은 큰 그림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무대 위에 세워진 집과 건물에 따라 그에 맞는 드레싱을 시작하는 것이다. 공연의 소품을 만들면서 무대를 채우게 된 노주연 소품 디자이너는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큰 그림만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었고, 소품이 배우 연기에 주는 영향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베르테르’를 작업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내가 만든 아주 작고 사소한 소품들이 때로는 배우들의 연기에 영향을 줄 수 있겠구나’라는 것이었다. 조승우의 연기를 보면서 특히 그런 부분들을 배웠다. 사실 이젤의 그림이 관객석에게 보이지 않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조승우씨가 이젤에 놓을 그림 두 장을 요청하더라. 하나는 발하임의 풍경,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이 그려진 그림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젤의 그림은 절대 관객석에게 보이지 않는다. 요청에 따라 그림을 놓았는데, 이번에는 그림의 위치가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했을 때, 이젤의 높이 상 그림이 위쪽에 있는 것이 맞는데, 도화지 속 그림은 너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목탄을 이용해 그렸으니 목탄으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라. 그때 조승우씨의 요청을 들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 사진=노주연 소품 디자이너 |
연기에 임하는 조승우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는 노주연 소품디자이너는 다른 이들이 쉽게 생각하는 작은 소품들이 사실은 배우와 매우 밀접해 있다고 설명했다.
“작업을 하다보면 소품에 대해 세세하게 요청을 하시는 배우들이 있다. 이를 테면 술병을 여는 장면에서 두 번이 아닌 세 번 돌리면 열릴 수 있게 해달라든지, 아니면 부채를 펼쳤을 때 ‘차라락’이 아닌 ‘착’ 펴질 수 있게 해달라든지. 처음에는 ‘두 번을 돌리나 세 번을 돌리나 똑같은 거 아닌가’라고 투덜대기도 했는데, 후에 공연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사소하다고 여겼던 모든 디테일들이 알고 보면 노래와 안무와 동선, 연기를 모두 검토하고 연습한 끝에 내려진 결과였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요구하는 디테일은 작품에 대한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일종의 장인정신이었다. 그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만든 소품들을 통해 내가 배우들의 연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베르테르’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에 대해 노주연 소품디자이너는 “보이지 않는 소품들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현재 노주연 소품디자이너가 작업에 임하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배우들이 작품에 최대한 몰입할 수 있게끔 소품의 사소한 디테일을 배우들의 요구에 따라 맞춰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소품이 극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 노주연 디자이너는 “소품 디자인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공연의 맛”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배우들의 디테일한 요청들이 이해가 안 됐다. 너무 디테일하게 요청하니 이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할 것도 많다보니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니다. 최대한 배우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건 여담인데 소품을 잘 활용하는 분들이 연기도 잘 하시더라. 똑똑하게 소품 운용하신 분이 똑똑하게 연기를 하시고, 때로는 제가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을 알려 주기시도 한다. 괜히 연기파 배우가 아닌 것 같다.”
◇ 소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노주연 소품 디자이너가 작업을 하면서 유독 신경을 쓰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깨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기’였다. 연극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역동적인 안무까지 곁들여지는 뮤지컬의 경우 조금이라도 튼튼하지 않으면 공연 도중 갑자기 망가질 수 있고, 이는 공연의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떨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든다. 던져도 부셔지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때로는 예쁜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무대 위에서 날리는 종이까지 소품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다. 공연을 보다보면 A4 용지들을 흩뿌리는 장면들도 있는데, 그 마저도 공연에 최적화 될 수 있도록 한 장 한 장 컬러링을 한 것들이다. 물론 관객들은 모른다. 소품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생각보다 무대 위 소품 치고 소품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떨어지는 꽃가루마저, 소품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는 노주연 소품디자이너는 ‘베르테르’의 하이라이트 신 중 하나인 해바라기 장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베르테르’의 엔딩 장면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키만한 해바라기를 들고 나온 뒤, 인사 후 무대 위에 세워놓고 자리를 뜬다. 무대 위 꼿꼿하게 서 있던 해바라기는 한순간에 쓰러지면서 객석에 있는 관객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남긴다.
“사실 해바라기는 제가 만든 것은 아니고 정승호 선생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 조광화 연출님이 ‘엔딩에 해바라기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이에 정승호 선생님이 ‘그럼 그 해바라기가 다 같이 쓰러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아이디어를 쌓으셨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장면이다. 소품을 만들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박수를 쳤다. 해바라기가 쓰러지는 장면은 선생님 아이디어인데, 그 소품을 만든 사람이 저이다 보니 본이 아니게 득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다.(웃음)”
‘베르테르’의 소품 중 눈에 띄는 또 다른 소품 중 하나는 ‘자석 섬 이야기’의 오토마타 장치이다. 노래에 맞춰 움직이는 오토마타는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형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그림자극으로 만들었다고 마리오네트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연습실에서 연습할 때까지만 해도 오토마타가 아닌 그림자극이었다. 사실 자석왕자 이야기를 만들 때 제일 우선시 됐던 것은 이를 활용하는 캐시가 들고 들어와서 응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자극에서 지금의 오토마타로 바뀐 이유는 첫 번째로 조금 더 역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했고, 자석왕자 이야기가 극에서 이후의 장면들을 암시하는 중요한 장치이기에 임팩트가 있어야 했다. 오토마타는 저 혼자의 힘이 아닌 많은 분들과 선생님,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 수 있었다. ”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소품디자인은 잘 해도 본전, 누구에게 공을 인정 받기도 힘들고, 조금이라도 탈이 나면 곧바로 티가 나는 영역 중 하나이다. 쉽지 않은 곳에 발을 들인 노주연 소품디자이너지만, 이러한 힘듦 속에서도 공연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져나갔다.
“공연을 또 만나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그러시더라. 주위에서 ‘딸이 뭐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우리딸 무대에서 노가다해요’라고 답하신다고. 물론 몸이 고생스러운 것도 있로, 제작환경과 먹고 사는 것에 고민을 늘 하면서도 공연이 주는 기쁨, 카타르시스가 있기에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것 같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