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뮤지컬 ‘쓰릴미’의 가장 큰 매력은 극을 이끌어 가는 두 배우의 연기이다. ‘쓰릴미’에서 강렬한 볼거리를 원한다면 실망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쓰릴미’에는 그 흔한 무대전환도 없으며,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음악도 듣기 어렵다. ‘쓰릴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단 한 대의 피아노 뿐.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최소한의 재료만을 남긴 ‘쓰릴미’는 누가 연기하느냐에 극의 흥행과 성격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이 같은 ‘쓰릴미’에 배우 외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과 디테일을 잡는 연출이다. 배우가 극의 몰입도를 이끈다면, 연출가는 배우가 이끌어나갈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쓰릴미’는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전대미문의 유괴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음악과 심리 게임을 방불케 하는 남성 2인극의 명확한 갈등 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디테일한 해석을 이끌어내며 2007년 초연 이후 마니아 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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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재관람 비율이 높아 ‘회전문 작품’의 대표주자인 ‘쓰릴미’는 마니아층이 단단한 작품으로 꼽힌다. 마니아층이 단단하다는 것은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예리하고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 포착할 정도로 세밀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2014년 공연부터 ‘쓰릴미’의 연출을 맡아온 박지혜 연출가는 “‘쓰릴미’를 처음 연출할 때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마음의 상처가 빨리 치료될 수 있을 때 하자 싶어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쓰릴미’와 인연은 생각보다 깊다. 2008년도 재연부터 조연출로 참여해, 2011년 충무 버전을 제외하고 쭉 함께 해왔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해 왔으니 잘 알고 있어서 (연출을)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제안이 왔고, 고민 끝에 하게 됐다. 지인들의 조언이 컸다. 특히 친분이 있는 송원근 배우와 어렸을 때부터 작업을 했던, 친남매와도 같은 전순열 조연출이 ‘하는게 맞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힘을 줬다.”
연출에 따라 ‘쓰릴미’는 단순한 퀴어극이 되기도 하고, 인물의 감정과 이에 따른 관계 변화를 치열하게 그린 작품이 되기도 한다. 박 연출가는 ‘쓰릴미’를 연출하면서 가장 신경 쓴 점으로 “두 사람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다”고 설명했다.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저는 계속 하면서 집착을 할 정도로 둘의 관계가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많은 분들이 브로맨스라고 말을 하는데, ‘쓰릴미’는 브로맨스 보다는 관계표현이 더 중요한 작품이다.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표현의 질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쓰릴미’가 동성애와 살인을 다루지 않느냐. 이들의 관계가 얼마만큼 친밀하고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으면 중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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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연출가가 담당한 ‘쓰릴미’가 흥미로운 것은 일명 ‘네이슨(나) 전문 배우’로 불리던 이들을 네이슨이 아닌 리처드(그)로 캐스팅을 했다는 것이다. 2014년 ‘쓰릴미’에 리처드로 캐스팅 됐던 김재범의 경우 네이슨을 여러번 연기했던 배우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정동화 역시 작년까지 네이슨으로 캐스팅 돼 왔었다.
“김재범이나 정동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같은 역할로 매번 다가가는 것보다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 있겠다 생각을 했었고, 제안을 했을 때 오케이를 해 주셔서 시도하게 됐다. 김재범의 경우 그저 겉모습을 본다면 네이슨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보다보면 순간순간 변하는 눈빛들이 리처드스러운 면이 있다. 김재범의 그런 부분을 포착한 다른 프로듀서 분들도 제안을 해 주시더라.”
2014년과 2016년, 두 번에 ‘쓰릴미’ 연출을 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디테일은 없을까. 이에 대해 박 연출가는 다른 부분보다 각 배우 개개인의 연기에 신경을 썼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달라진 디테일을 설명했다.
“1장과 2장이 절친한 네이슨과 리처드의 모습을 그렸다면 3장에서부터는 무게 중심이 리차드에서 네이슨으로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부터 게임이 시작된다고 봤고, 이에 따라 배우들에게 표정연기와 디테일을 지시했다. 예를 들자면 타자기로 협박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네이슨이 시선을 들고 정면을 보게 하는 것이다. 배우마다 지시한 디테일도 다르다. 장면을 보면 네이슨이 ‘지금까지 완벽해’라는 대사가 있는데, 이는 강영석에게만 시킨 대시이다. 이상이나 정욱진의 네이슨은 오롯하게 리차드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울린다. 반면 강영석의 네이슨은 예민하고 날이 선 느낌이 있다. 덕분에 제가 의도했던 차가움과 날카로운 네이슨 표현이 가능하더라. 그래서 강영석에게만 따로 지시한 디테일들이 몇 있다.”
강영석을 향한 박 연출가가의 신뢰는 두터워 보였다. 2011년 뮤지컬 ‘화랑’으로 데뷔한 강영석은 2015년 연극 ‘모범생들’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이다. 신인배우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91년생의 어린 배우의 무엇이 박 연출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강영석은 마치 어린 신성민을 보는 느낌이다. 함께 연습했던 배우들도 이 이야기를 하더라. 신성민에서 느꼈던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작년에 제가 신성민에게만 했던 디렉션들이 있는데 그것을 영석에게 투입하려고 노력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박영수도 보인다. 강영석의 가장 큰 장점은 스펀지 같다는 것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가르치는 것들을 쏙쏙 빨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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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석 외에도 ‘쓰릴미’에 출연하는 배우 임병근, 이상이, 정욱진, 강동호, 정욱진을 향한 박 연출가의 신뢰는 두터워보였다. 이 같은 박 연출가의 신뢰는 크로스 페어로 드러났다. 크로스 페어는 메인 페어로 알려진 이상이-강동호, 정욱진-정동화, 강영석-임병근 외에도 다른 페어들과 호흡을 맞추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철저한 연습과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박 연출가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각 메인 페어들의 장점과 특징, 그리고 크로스 페어를 시도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욱진(나)과 정동화(그) 페어는 정말 친구 같고,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 같다. 강동호(그)와 –이상이(나) 페어는 조금 따뜻한 느낌을 준다면 임병근(그)과 강영석(나) 페어는 차갑다. 배우 별로 말을 하자면 정동화의 경우 네이슨을 연기했던 배우라서 그런지 베이스부터 네이슨과 친하다. 정동화가 표현하는 리차드를 보면 네이슨이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정욱진도 비슷하다. 그래서 둘이 유독 친구 같은 것 같다. 정욱진의 경우 어떤 장면에서는 우위선점이 빨라, 리차드와 핑퐁을 하는 것 같다. 강동호의 경우 가장 젠틀한 리처드며 그의 파트너인 이상이는 정말 리차드를 오롯하게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리처드를 너무 사랑하고, 옆에 있는 것이 좋아서 그에 동조해 살인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임병근은 게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리차드 같고, 그와 페어를 이루는 강영석은 정말 영리한 네이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페어는 날선 느낌이 난다. 메인 페어 말고도 크로스 되는 페어들마다 느낌이 다르다. 똑같은 연기를 한다고 해도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최대한 배우들에게 맞는 것을 찾았다”
2007년 초연된 ‘쓰릴미’는 2017년이면 10주년을 맞이한다. 박 연출가가 2014년부터 지속해서 ‘쓰릴미’의 자리를 지키며 10주년 ‘쓰릴미’를 진두지휘할지 아니면 새로운 연출가가 정해지면서 조연출로 활동하게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박 연출가에게 만약 10주년 연출의 자리를 맡게 된다면 캐스팅 하고 싶은 배우는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캐스팅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던 박 연출가는 “그냥 내 소망을 말해도 되느냐”고 되물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지창욱-강하늘 페어와 이지훈-오종혁 페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지창욱은 예쁘게 생겼지만,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은 상남자이다. 지창욱과 강하늘이 무대 위에 오르는 걸 보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이지훈-오종혁 페어의 경우 2014년 공연 당시 후발대로 들어와서 스케줄을 맞추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더 끈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이 무대에 섰을 때 노래나 연기도 잘 해줬고, 베테랑임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잘 따라주셨다. 만들어 가는 부분도 소중했고, 무엇보다 비주얼 깡패이지 않느냐.(웃음)”
남성 2인조 뮤지컬인 ‘쓰릴미’는 여자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피아니스트 또한 남자이다. 이 같은 소리는 ‘쓰릴미’ 연습실은 박 연출가가를 제외하면 남자들만 가득한 이른바 ‘금녀의 공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남자들 사이에서 연습을 이끌어 가면서 힘든 것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박 연출가가는 “하나도 없었다”고 웃었다.
“어느 작품을 하나 힘들기 마련인데, ‘쓰릴미’는 웃고 즐기면서 연습을 했다. 연습실에서 얻게 된 별명이 있는데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다.(웃음) 페어들이 잘 따라오니 신이 나서 계속 연습을 했고, 그러다보니 신을 4일 만에 완성한 거다. 배우들이 불평 없이 잘 따라와 준 덕분에 크로스 페어 호흡도 많이 시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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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신나고 즐겁게,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철저하게 만들어 나갔다는 박 연출가가지만, 연출과 관련해 아쉬운 부분도 있기 마련. ‘쓰릴미’에서 가장 아쉬운 점으로 박 연출가는 ‘창문’을 꼽았다.
“‘쓰릴미’의 연출을 맡으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창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기존의 분위기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극장 구조상 할 수 없었고, 구조를 바꾸지 않는 내에서 가장 큰 변화를 주는 것이 바로 의상이었다. 만약 다음에도 제게 연출을 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극장이 바뀐다면 다음에는 창문을 시도하고 싶다. 창문을 만든 뒤 네이슨이 심의를 할 때 포근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다. ‘쓰릴미’자체가 원세트이다보니, 최대한 무대전환 없이 실내와 실외 공간을 표현하고 싶다.”
조연출가에서 연출가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전문 조연출가의 길과 연출가의 길에서 고민하던 박 연출가는 결국 ‘쓰릴미’를 맡으면서 연출가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오랫동안 공연계에 있으면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무척이나 깊었던 박 연출가, 그는 어떤 계기로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사실 어렸을 때 성악을 공부했었다. 전통 성악보다 뮤지컬을 하는 것이 좋았고, 그래서 예고 입시 준비를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습을 너무 혹독하게 한 나머지 예고 입시를 앞두고 성대결정이 온 것이다. 결국 성악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무대에 서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만약 내가 무대에 서지 못한다면 내가 무대를 만들어야겠다’였다. 어찌됐든 공연계에서 계속 종사하겠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쓰릴미’를 통해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박 연출가의 다음 도전은 뮤지컬 ‘마이 버킷리스트’였다. 자신의 성향과 전혀 다른 작품인 만큼 이를 잘 만들어서 관객과 만나는 것이 박 연출가의 새로운 목표였다.
“‘마이 버킷리스트’는 ‘쓰릴미’와는 달리 파스텔과 같은 작품이다. 실제 연기를 처음 하는 친구도 있고 배우들도 어리다. 솔직히 저는 컬러로 따지면 파스텔보다는 ‘쓰릴미’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마이 버킷리스트’는 저게 있어 도전과도 같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