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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가 <사진 제공=김병관> |
영국 현지시간으로 16일 저녁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자 심사위원회는 소설가 한강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강 작가는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 중국의 유명 작가 옌렌케 등을 제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9년 전 출간돼 잊혀져가던 동북아의 한 소설을 번역해 해외에 처음 소개한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29)도 한강과 함께 공동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보이드 톤킨 심사위원장은 “잊혀지지 않는 강력하고 근원적인 소설”이라며 “압축적이고 정교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는 극찬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자 6인 중 1인의 자격으로 현장을 찾았던 소설가 한강은 “책을 쓰는 것은 내 질문에 질문하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고통스러웠고 힘들기도 했지만 가능한 한 계속해서 질문 안에 머물고자 노력했다. 질문을 공유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폭압의 서사로 인간을 그린 ‘채식주의자’
소설 ‘채식주의자’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한 여성의 결심과 그를 향한 폭압의 서사를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으로 그린 세 편의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에, ‘몽고반점’은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에, ‘나무 불꽃’은 ‘문학 판’ 2005년 겨울호에 실렸고, 2007년 10월 ‘채식주의자’란 제목의 연작소설집으로 묶여 정식 출간됐다.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2007년본 초판 해설에서 한강 소설의 기원은 상처(傷處)라고 평했다. 그는 “서로의 상처를 나눠지면서 그들은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상처의 깊이는 고통의 크기와 비례하고, 인간은 그 고통을 공유하며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다. 9년 전 세상의 빛을 본 소설이 번역으로 세계 문학시장 장벽을 넘자 세계가 환호했다.
◆韓, 6번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국
한강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일곱 번째 수상자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2005년 이스마일 카다레를 시작으로, 2015년 라슬로 크라스나오카이까지 전 세계 작가들에게 영예를 안겼다. 미국은 필립 로스, 리디아 다비스 등 이 상을 유일하게 복수 배출한 나라이며, 알바이나, 나이지리아, 캐나다, 헝가리는 수상자를 1인씩 배출했다. 한국은 이제 여섯 번째 수상국의 명성을 확보했다. ‘채식주의자’는 알바니어아와 헝가리어 외에 영어로 쓰이거나 번역된 다섯 번째 수상작이다.
노벨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통칭되는 맨부커상은 1969년 영국 출판사 부커사가 제정했다. 2002년 맨(MAn)그룹이 후원자로 나서면서 명칭이 ‘맨부커(The Man Booker)상’으로 바뀌었다.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비(非)영연방 작가들에게 수여한다. 한강 이전에 한국작가가 이 부문의 후보자로 거명된 적은 없다. 한강은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하다.
◆깊고 넓은 주제로 인간성을 탐구
한강 소설은 초기부터 웅숭깊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는 인간 상처를 탐구하는 그의 문학관을 세상에 알렸다. 첫 장편 ‘검은사슴’은 한낮 도심을 알몸으로 뛰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성의 모습으로, 두번째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은 석고로 인체의 본을 뜨는 라이프캐스팅으로 인간 심연을 파고들었다.
또 ‘바람이 분다, 가라’는 촉망받는 여자 화가의 의문사에서 기억과 고통을, ‘희랍어 시간’에서는 최고(最古)의 언어인 희랍어란 소재로 말(言)을 잃어가는 여성의 삶에서 침묵과 소멸을 조명했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희생과 상처를 다뤘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낙차 없음을 증명”
한강 작가의 수상소식에 국내에서도 찬사가 잇따랐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순수한 문학적 평가를 통해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을 탄 첫 사례가 될 것”이라며 “세계 속의 문학이면서도 언어장벽에 가로막혀 절연돼 있던 한국문학이 번역으로써 장벽을 허물었다. 한국문학이 한반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라는 틀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간의 낙차가 없다는 진실이 밝혀진 사건”이라며 “한국문학 위기설이란 쓸데없는 경멸의 담론에 대한 저항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극찬했다. 아울러 “이미 한국문학이 지역적인 내부 문제뿐 아니라 세계적 공감을 살 만한 주제와 이미 만나고 있었음을 증명했다”고 덧붙였다.
◆오르한 파묵·中 옌렌케도 제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넘은 경쟁작들의 작품 수준도 깊고 높았다. 옌렌케의 ‘The Four Books’는 노동교화소에서 핍박받는 인물들의 현실을 다뤘다. 수감자들인 그들은 밀을 수확하거나 철을 제련하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간의 비유적 삶에서 억압에 대항하는 신념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A Strangeness in my Mind’는 이스탄불 거주민 남성의 이야기다. 터키의 길거리에서 40년간 요거트나 간단한 식사를 파는 그의 시선으로 도시변화의 순간, 정치적 충돌, 군사 쿠데타 등을 그린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지, 운명이 우리의 내면을 결정할지를 되묻는 작품이다.
로버트 시탈러의 ‘A Whole Life’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안드레아스가 아내 마리와 태중의 아이를 잃고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모습을 그렸다. 절대적 고독 속에서 근원과 아름다움을 모색하는 수작이다.
아울러 엘레나 페란테의 ‘The Story of the Lost Child’는 나폴리가 고향인 두 여성이 소녀시절을 거쳐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떠나온 공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호세 에두아르도 아구알루사의 ‘A General Theory of Oblivion’는 고립돼 살던 한 여성이 자신의 테라스에 올라온 사바르라는 어린 소년을 우연히 만나면서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詩로 먼저 데뷔, 부녀가 함께 이상문학상 수상도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 소설가는 연세대 국문과를 1993년 졸업했다. 그해 계간 ‘문학과사회’에 겨울호에 시로 먼저 등단했고, 이듬해 단편소설 ‘붉은 닻’으로 신춘문예 등단했다. ‘채식주의자’의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은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 7인의 만장일치로 뽑혔고, 1970년대생으로서는 첫 수상자였다. 또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이상문학상을 부녀(父女)가 함께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
소설가 한강은 지난 4월 매일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압축해냈다. 한강은 “인간이란 주제는 내가 지금까지 소설을 쓴 동력”이라며 “인간에 대한 질문은 계속 또 다른 질문을 부르고, 그 질문을 딛고 앞으로 가는 과정 속에 소설가로서의 내가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상처론’으로 빗대진 한강 문학은, 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모든 상(傷)이 맺히는 문학적 처(處)와도 같다.
◆소설가 한강의 ‘말말말’
-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中 작가의 말)
- “말과 침묵, 어둠과 빛, 꿈과 생시, 죽음과 삶, 기억과 현실 사이에 공간이 있다. 내 말들이 그 공간을 진실하게 통과해 나올 수 있기를 간절
- ”소설은 인간에 대한 질문을 정연하게 해준다. 소설보다 산다는 게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4월 매일경제신문 인터뷰 中)
- ”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나에게 밥 같은 것이었다. 자유와 위안, 충일로 몸을 덥혀주는 밥.“ (2005년 1월 이상문학상 수상소감 中)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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