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기자와 만난 피아니스트 조성진(22)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에 질색했다. "전 그저 이제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에요. 피아노 레퍼토리는 죽을 때까지 쳐도 다 못칠 만큼 많죠. 제 레퍼토리를 계속 넓혀보고도 싶고, 동시에 한 곡을 아주 깊이 연구해서 오래 연주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과연 뼈 있는 말이었다. 지난 3일 밤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그의 리사이틀은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내면에 열정과 패기가 들끓는 젊은 천재의 기량이 유감 없이 발휘된 무대였다.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국내에서 연 첫 리사이틀이었다. 모든 티켓은 이미 두 달 전 오픈하기가 무섭게 동났다. 공연을 앞둔 콘서트홀 로비는 빽빽한 구름관중으로 출근 길 만원버스 안을 연상시켰고, 1천장 마련된 프로그램 북은 일찌감치 다 팔렸다 . 소년의 티는 벗고 어느덧 호리호리하고 차분한, 완연한 청년의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조성진은 자신을 향한 2천 관객의 드높은 기대를 기어이 만족시켰다.
공연은 1부의 알반 베르크 피아노 소나타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 C단조 D.958, 2부의 쇼팽 발라드 1~3번으로 구성됐다. 혁명적이고도 낭만적 성향의 작품을 다수 남긴 20세기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 베르크는 국내 팬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인물. 피아니스트 조은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는 "피아니스트에게 베르크 작품은 선율의 흐름이 느슨하면서도 서정적이라 공연의 시작점으로 선호되는 곡인데, 조성진의 베르크는 유독 진하고 짙은 느낌이었다"며 "상승 구간에서 의도적으로 강하게 몰아치는 게 꼭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감상을 전했다. 앞서 조성진은 대중들에게 일견 난해하게 여겨질 수 있는 베르크 곡을 선택한 이유로 "가장 자신있으면서도 나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음악이 무엇일까 고민한 결과"라고 언급했다. 베르크가 이 곡을 작곡했을 당시 나이는 지금의 조성진보다 한 살 많은 스물 셋. 치열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그려진 인상적 무대였다.
이어진 슈베르트 소나타에서 역시 젊은 열기와 낭만적 뉘앙스가 돋보였다. 슬프고 고요하기보다는 격정적이고 스릴이 오갔다. 조은아는 "다수 관객들에게 블록버스터 영화같은 쾌감을 전해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정제되고 서정적인 표현을 가미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쇼팽이 울려 퍼진 공연의 2부였다. 원체 드라마틱한 쇼팽의 발라드가 혈기왕성한 청년의 열정과 만나 압도적 시너지를 뿜어낸 탓이다. 까다로운 심사위원 각각의 입맛을 고려해 테크닉을 정밀하게 설계해야 했던 쇼팽 콩쿠르 때와 달리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한층 편안하고 자유롭게 표현한 모습이었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는 "지극히 드라마틱한 쇼팽의 곡들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해석하며 제스처도 크게 보여주는 모습이 흥미진진했다"며 "최대치의 몰입도와 설득력을 끌어낸 점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마치 제 옷을 입은 듯 공연장의 공기를 쥐락펴락하며 뽐낸 그의 능란한 솜씨에 객석은 터질 듯한 함성과 박수소리로 화답했다. 끊일 기색 없는 환호에 조성진은 드뷔시의 '달빛'과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과연 이 야심만만한 청년이 앞으로 보여줄 놀라움의 끝은 어디일까 자문하게 되는 밤이었다. 조성진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선입견'"이라며 "선입견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어릴 적부터 나름의 고민과 싸움을 해왔다"고 전한 바 있다. 파리에서 유학하며 전설적인 대가들의 연주를 눈여겨 보고 여기서 배울 점만을 뽑아내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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