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4주'를 보면 숨이 턱 하고 막혀드는 순간이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주인공 아스트리드(줄리아 옌체)가 돌연히 카메라를 정면 응시할 때다. 이것은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에서는 거의 금기로 간주되는 것이다. 어떠한 결단이 있지 않고서야 좀처럼 감행하기 힘든 시도. 이른바 (영화와 관객간) 경계 허물기.
이런 순간들이다. 임신부 아스트리드가 의사로부터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초음파 검사 도중 아이의 심장이 기형이라는 사실을 추가로 접하였을 때, 그리고 고뇌하던 그녀가 24주 만에 낙태를 결심하며 제 아이와 작별을 고할 때. 찰나의 순간들이지만 그 때마다 그녀는 관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 심정 이해가세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영화에서 배우가 관객을 응시하는 순간은 드물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거장 잉마르 베르히만이 1953년 '모니카의 여름'으로 영화사상 최초의 카메라 정면 응시를 선보인 이래 후배 감독들은 종종 이러한 결단을 실행해왔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마지막 숏에서 어린 앙트완의 시선이 그랬고, 최근에는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 이상일의 '분노' 말미 신 등이 그러했다.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로 영화는 관객을 응시했고, 말을 건넸다.
'24주'를 연출한 독일의 여성 감독 앤 조라 베라치드는 이러한 결단에 대해 "관객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실제로 베라치드의 선택은 소기의 효과를 거둬낸 듯하다. 영화를 보는 당신은 스크린 바깥의 방관자적 위치에만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주인공의 딜레마에 동참하며 각자의 답을 찾느라 헤맬 것이다.
영화는 스탠딩 코미디언 아스트리드의 내적 고뇌에 집중한다. 사실 다운증후군이라는 것 자체가 그녀 부부가 낙태를 택하게 된 결정 요인은 아닌 듯하다. 귀엽기 그지없는 어린 아들이 "토나올 것 같아. 장애아는 나도 싫어"라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하고, 지인들의 모호한 반응이 부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든 아이를 키울 준비를 한다.
하지만 초음파 검사를 거치며 아이가 심장 기형까지 앓고 있음을 알게 된 뒤로 고뇌는 더욱 심화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가슴을 열어 오랜 시간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수술의 성공이 보장돼 있지도 않다. 다행히 살게 되더라도 이 아이의 고통받는 삶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다.
영화는 몽환적 신들이 서사의 사이사이로 틈입한다. 태아의 세밀한 모습이 그녀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함께 돌출적으로 끼어든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이 이채로운 장면들은 그녀가 얼마나 격심한 고뇌에 휩싸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선택이 어떤 것이 됐든, 그 선택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함을 직감케 된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때때로 괴로운 결단의 순간에 직면하곤 한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아프고 슬픈 순간들을 감내하며 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자란다. 그것은 영화를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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