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뒤척인다. 올해 나이 마흔 일곱인 브래드(벤 스틸러). 그는 지금 열패감에 젖어 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성공한 동창들에게 끝모를 질투심을 느끼면서. 침울한 표정으로 그는 되뇌인다. "인생을 비교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비교할 때면 실패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기분이 심해진다."
대학 동창 닉은 '화려하고 방탕하게' 사는 할리우드 거물 감독이다. 최근 결혼식에 그는 브래드를 부르지 않았다. 해츠펠드는 '황당할 정도'의 부를 거머쥔 해지펀드 대표이고, 빌리는 마흔에 IT사를 팔아 섬에서 한량처럼 지내고 있다. 아름다운 두 하와이 여인과 함께.
그리고 학창 시절 라이벌 크레이그. 백악관에서 일했던 그는 베스트셀러 책을 여러 권 낸 유명 저자다. 브래드는 TV에 그가 나올 적이면 적잖이 불편해진다. "명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온세상이 내 심기를 건드리는 기분." 그렇다면 그는? 비영리 회사 온라인 홍보를 돕는 1인 기업가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된다.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는 제목처럼 제 삶을 엉망진창이라 여기는 이 땅의 '브래드'들에게 "괜찮아요"라고 토닥여주는 영화다. 한때 "세상을 사랑했고, 세상도 나를 사랑했다"고 여겼던 브래드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날 미워하고, 나 또한 그렇다"고 되뇌이며,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긴다.
서사는 그런 브래드의 내적 순례기로 이뤄져 있다. 열등감에 얼룩진 그의 황폐한 내면이 차츰 갱생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를 위해 개입되는 사건은 네 가지다. ①음악에 재능 있는 아들 트로이(오스틴 에이브람스)의 하버드 입학 면접에 차질이 생긴다. ②옛 친구 크레이그에게 자존심을 무릎쓰고 10년 만에 전화해 도움을 구한다. ③크레이그의 도움으로 아들은 무사히 면접을 치르고 대입이 확정된다. ④이후 과거 제 전철을 밟으려는 하버드 여대생을 만나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물론 이는 외피일 뿐이다. 빈약해 보이지만 또 그렇지가 않다. 우선 브래드의 황량한 내면을 표현하는 벤 스틸러의 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정 연기가 일품이다. 이를 받아주는 오스틴 에이 브람스의 연기 또한 수준급이며, 그 자체 곱씹을 내용들의 성찬인 브래드의 내밀한 독백과 잔잔한 유머, 익살스런 상상 시퀀스가 리듬감 있게 배치돼 극에 활력을 돋운다. 스스로를 풍자한 것이 분명한 마이크 화이트 감독(닉 역)의 깜짝 출연 또한 웃음 포인트다.
그리고 여기 눈여겨 볼 시퀀스(④) 하나. 극 후반 브래드와 하버드생 아냐나(샤지 라자)가 바에서 만난다. 인생 선배로서 조언좀 해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브래드는 소위 '꼰대'를 자처한다. 나도 옛날엔 너처럼 이상주의자였어, 너는 비영리 활동은 접고 돈이나 많이 벌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존경을 받으려거든 빌게이츠처럼 돼라, 난 혹여 기부라도 부탁할까 동창들이 피한다고, 패배자인 거지. 이를 가만히 듣던 아냐나의 반문이 인상적이다. "애초에 왜 경쟁하세요? 이미 충분히 갖고 계시면서."
그런 것이었다. 브래드 옆엔 언제나 다정하고 낙천적인 아내 멜라니가 있었다. "우리가 키웠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로 똑똑하고 훌륭히 자란" 아들 트로이가 있었다. 그랬다. 세상을 소유할 순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었다. 진실로 가치있는 삶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 이제 브래드는 갱생한다. 오랜 만에 만난 크레이그가 제 자랑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이 속물을 뒤로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홀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간 아들에게로 가 아들 손을 꼭 잡고 함께 공연을 본다.
한동안 세상을 미워했던 그는 그렇게 "나는 아직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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