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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지진 대피 훈련을 서술한 챕터를 보자. VR 기기를 착용한 TV 프로그램 진행자는 지진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자 무릎을 꿇고 가상의 탁자 아래로 뛰어든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던 그를 저자가 가로막아 실제 세계의 벽에 부딪히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이 책의 강점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대부분 사례는 저자의 체험에서 따왔다. 인터넷과 도서관에서 찾은 사례를 그저 취합해놓은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다.
이 책의 저자는 제러미 베일렌슨 미국 스탠퍼드대 가상인간상호작용연구소(VHIL) 소장으로 VR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인지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특히 VR 심리학에 대해 천착하는 연구자다. 가상 경험으로 사람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20년 동안 실험해왔다. 최근 그의 연구는 VR가 교육, 환경 보전, 공감, 건강 분야를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가 보는 VR는 경험 창조자다. 그곳에 실제 있는 느낌인 '현존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다른 미디어와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현존감은 다른 존재와의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진다. VR 다큐멘터리 '시드라에게 드리운 구름'은 시청자를 북부 요르단 자타리 난민 캠프로 데려간다. 내전으로 터전을 잃은 시리아인 8만명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어지러운 난민 캠프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빵을 구우면서 웃고 떠들고, 여자아이들은 축구장에서 공을 차며 논다. 통곡하는 여인을 클로즈업하거나 포격으로 생긴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신파적 장면은 없지만 관객은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가 고통을 애써 견뎌내는 현장에 스스로 '존재했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야기꾼이 꿈꿨지만 제4의 벽(관객과 배우 사이에 있는 가상의 벽)에 가로막혀 이뤄내지 못했던 것이다.
VR의 두려운 측면에 대해서도 충분
[박창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