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좁다고, 답답하다고, 내가 할 일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오십시오."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사업을 펼치고 있는 (주)씨이오스위트 김은미 대표는 청년들과의 만남을 가질 때마다 위와 같은 말을 강조하곤 합니다. 김은미 대표는 일찌감치 동남아 시장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인도네시아에서 창업을 해 현재는 연 매출 400억 원의 중견기업을 일구어냈습니다. 그녀가 하는 일은 기업들에게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회계, 법률 등 기업운영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지원하는 '서비스 오피스' 사업입니다. 현재는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7개 국가 8개 도시에서 14개 지점을 운영하며 아시아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는지, 그녀의 우여곡절 많은 인생 스토리를 MBN '정완진의 최고다(최고 경영자의 고귀한 다섯 가지 비밀)' 제작진이 직접 취재했습니다.
Q. '서비스 오피스' 사업이라고 하면 아직 생소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대표님이 하고 계시는 사업에 대해 간단히 소개 좀 해주세요.
사무공간과 서비스의 아웃소싱, 즉 비즈니스 아웃소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예로 A라는 기업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려고 할 때, 현지에 있는 저희 사무실을 제공해드리고, 그 외에도 각종 법률, 세무, 회계 서비스를 제공해드립니다. 시장조사, 직원채용까지도 해드리고요. 간혹 어떤 분들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냐'고 물으시곤 하는데,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맞춰서 해드린다는 게 저의 운영 방침입니다. 다른 기업들이 사무실 임대에만 머무는 1차원적인 사업모델에 머물러있다면, 저는 거기에 '경영관리'를 접목시키는 형태로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드리기 위해 사무공간도 최고급으로 꾸미고 있지만, 직원들도 외국어를 2개 이상 구사하고, 경영학 석사 학위(MBA) 등의 자격을 갖춘 최고급 인재들로만 채용하고 있습니다. 사무실 임대 외에 이런 디테일한 서비스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해드리는 것은 서비스 오피스업계에서 저희가 유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Q.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개념인데요?
네.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사업이지만, 사실 해외에는 보편화된 사업이에요. 비즈니스 센터에 대한 국내 기업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낮다는 게 아직은 한계이기도 하고요. 제가 해외에서 20년 넘게 살았는데, 그동안 한국의 많은 중소기업 CEO 분들이 중국, 인도네시아 등에 오셔서 실패를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숱하게 봤습니다. 그때마다 정말 안타까웠죠. 제한된 인력, 제한된 시간 안에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법인을 설립하고, 직원을 채용하고, 영업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런 일들을 저희 센터를 통해 하시면, 일사천리로 해결될 텐데도 잘 이용하지 않으시더라고요. '투자'로 생각하느냐, '버리는 비용'으로 생각하느냐는 한끝 차이입니다. 뭐, 20여 년 전 이 사업이 시작될 당시만 해도 비즈니스 센터를 터부시 했던 일본인 기업들이 현재 주 고객이 되어 있는 걸 보면, 한국 기업들도 앞으로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죠.
Q.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중국 등 아시아 7개 국가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데요.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사업을 확장하는 게 웬만한 배짱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업을 키울 수 있었나요?
정확하게는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태국, 한국 등 아시아 7개국 8개 도시에 14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사를 하나씩 늘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참 많이 말렸어요. (웃음) 하지만 그때마다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쳤으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사업을 이렇게 확장시킨 것은 특유의 도전정신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고, 항상 도전하고 모험하길 즐겨하는 성격이거든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긍정의 힘으로 '한계'를 돌파하려고 노력했던 것.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Q. 많은 청년들이 대표님을 '도전'의 아이콘으로 많이 생각하는데요?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1년 만에 사표를 쓰고 해외로 나간 에피소드도 유명하죠.
네. 제 첫 직장은 시티은행이었어요. 연봉도 많이 주고, 외국계 기업이니 입사하게 되면 해외에 다니면서 멋있게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180도 달랐어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숫자만 보는 게 다였죠. 너무 너무 괴롭고 답답했어요. 제 적성과도 맞지 않았고요. 그러니 하는 일마다 실수연발이었고, 회사에선 저를 문제아로 생각했어요. 고액 연봉에 현혹되어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입사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나중엔 돈이고 뭐고 싫어지더라고요. 결국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호주로 유학을 갔어요. 모두들 미쳤다고 했지만, 저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제가 싫어하는 건 못 하는 성격이에요. 은행에서 평생 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했죠. (웃음) 어쨌든 글로벌 비즈니스를 배울 수 있는 공부를 해봐야겠다 싶어 호주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마케팅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반대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어머니한테만 말씀드리고 야반도주 하듯이 호주로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당차고 무모한 행동이었죠.
Q.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창업의 '첫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학을 마치고는 호주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하는 회사였어요. 폐쇄 위기의 방콕지사를 살려내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지사를 설립해 대박을 터뜨리는 등 7년 반 동안 회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어요. 승승장구 승진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거기까지였어요. 유리천장이 저를 가로막았죠. 이방인으로서, 여자로서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더군요. 궂은일은 제가 다 도맡아서 했는데, 저보다 직급도 경력도 낮은 백인의 금발미녀를 저의 상사로 발령 내니, 화가 나죠. 회사와의 신뢰가 깨진 순간, 사표를 냈어요. 그게 창업의 계기였습니다.
Q. 두렵지 않았나요?
사실 저는 평생 사업이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 어머니가 이것저것 사업을 하셨는데, 그게 잘 안 되서 빚쟁이한테 시달리는 모습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러니 창업이란 것에 대해 많이 두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사표를 낸 후, 다른 곳에 취직하려고 해봤지만 저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거든요. 세상이 저를 고용해주지 않으니, 마지막 방법은 제가 저를 고용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아버지와 남편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서 사업을 준비했어요. 누군가는 간도 크다,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물으시곤 하는데, 그래도 자신은 있었어요. 7년 반 동안 호주 회사에 있으면서 그룹 전체 실적이 제가 1위였거든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만큼만 하자고 생각했죠. 그렇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 사업을 일구기까지의 과정도 굉장히 어려웠다고?
창업한 지 두 달 만에 IMF 경제위기가 터졌어요. 경제 대란에 대한 분노로 인도네시아에선 폭동까지 일어났죠. 방화, 약탈, 강간 등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어요. 환율도 요동을 치니, 투자했던 돈도 몇 십 배 손실이 났고요. 입주해있던 고객들은 철수하겠다고 하고, 정말 눈앞이 깜깜해왔어요. 설상가상 몇 년간 임신이 안 돼서 포기하고 있던 찰나, 임신까지 덜컥 되어버렸어요. 사업이 안정된 상황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껏 좋아할 수도 없었어요.
가족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성화였지만, 그럴 순 없었어요. 아버지, 남편 돈까지 투자해서 시작한 사업인데, 여기서 주저앉으면 온 가족들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니까요. 임신 때문에 체중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몸은 탱탱 부어서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고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하루 종일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만나주는 사람도 없고, 문전박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울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어떤 때는 잠 든 채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순간들도 있을 만큼요.
Q. 하지만 결국 성공을 일궈내셨잖아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니, 그 '구멍'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어요. 그때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기업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업을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철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명이 위협받는 곳에 직원을 상주시킬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요. 그래서 제안했죠. 제가 현지에 남아서 기업들의 회계 업무부터 법률 업무, 시장조사, 직원 채용 등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대행해주겠다고요. 그게 기업들에게 통했고, 지금은 그런 서비스들을 좀 더 고도화시켜 다른 기업들과 비교되는 결정적인 차별화 전략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Q. 사람들은 대표님의 화려한 일상을 조명하며 부러워하지만, 실제 대표님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참 많이 고생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초창기에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제가 디자인, 공사까지 다 나서서 했어요. 공사장에서 먹고 자며, 링겔까지 맞아가면서요. 또 입주할 고객사들을 찾기 위해 사방을 뛰어다녔어요. 하이힐 굽을 한 달에 10번은 갈았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들은 보통 묻히기 십상이죠. (웃음)
어디 그 뿐인가요. 각 나라에 진출할 때마다 제 한계를 시험하는 각종 어려움들이 많았어요. 어떤 회사는 저희 디자인, 로고까지 그대로 베껴서 개업을 하는가 하면, 믿었던 직업이 몰래 고객을 빼가서 바로 옆에 창업한 경우도 있었고, 건물 임대주가 저희를 배신하고 같은 건물에 경쟁회사를 차린 적도 있었어요. 뭐,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끝이.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결국 저의 역경지수를 높여주었고, 각종 고난과 역경을 수백 번 견디니 성공의 달콤함이 주어지더군요. 성공은 절대 그냥 오지 않아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 거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해요.
Q. 그런 역경과 고난을 이겨냈기 때문에 지금의 대표님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성공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제가 처음으로 썼던 책 제목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이 답하지 않거든 세상이 답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아등바등 하지 말고, 한국 밖의 세상을 봤으면 해요. 특히 지금은 아시아가 대세잖아요. 동남아 아니면 아프리카. 원대한 꿈을 이루고 싶다, 뭔가 자신의 한계를 박차고 스스로가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더 크고 더 많은 기회가 있는 세계 시장을 향해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견딜 수 있는 역경지수를 높이면 높일수록, 나중엔 어려운 일이 없어져요. 그러니 힘든 거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해요. 젊을 때 너무 편하면 나이 들어서 힘들어져요. (웃음) 젊을 땐 계속해서 역경지수를 올리는 연습을 하시고요. 도전하세요.
Q. 앞으로 대표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이젠 빨리 커야지라는 생각보다 천천히 더디더라도 내실 있게 가고 싶어요. 회사의 비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