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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12월 18일, 프랑스 진화론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장례식에서 그의 딸이 외쳤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라마르크는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눈을 감고 말았다.
그가 죽고 30년이 지난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이 태동했다. 다윈이 주장했던 ‘자연선택설’은 당시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었다. 자연선택으로 특정 개체가 살아남고, 그 수가 종을 지배할 만큼 개체수를 늘리는데는 적어도 수 억년이 걸린다는 게 당시 물리학자들 주장이었다.
그런데 라마르크 이론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짧은 역사를 감안했을 때 진화를 설명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딸의 바람처럼 ‘용불용설(用不用說·획득한 형질의 유전)’이 다시 학계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유전자와 DNA가 발견되면서 용불용설은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생물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얻은 특정한 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오른손 잡이 테니스 선수 오른 팔은 왼 팔보다 길지만 그 자손까지 오른 팔이 길게 태어나지는 않는 것과 같다. 과학적으로 용불용설은 틀린 이론으로 규정됐다. 생물의 진화는 ‘환경’ 보다는 ‘유전자’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났다. 세상이 다시 라마르크 볼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주창했던 용불용설은 틀렸다. 하지만 한 세대에 특정하게 나타난 형질이 대를 거쳐 유전될 수 있다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태동하면서 그의 개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DNA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아도 특정 형질이 나타나거나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세대에 출현한 형질이 2~3세대 정도 대를 이어 유전될 수 있다. 라마르크 용불용설과 유사하다. 김용성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유전체연구소장은 “용불용설은 틀렸지만 후성유전학적 측면에서 특정 형질이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며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후성유전학을 뒷받침하는 실험은 이미 다양하게 이뤄졌다. 2009년 학술지 ‘바이올로지리뷰’에 따르면 특정 화학물질에 노출된 초파리 후손은 13세대에 걸쳐 눈에서 뻣뻣한 털이 자라는 것이 확인됐다. 임신한 들쥐에 번식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에 노출시키자 후손이 대대로 병에 걸려 태어나기도 했다.
후성유전학에 불을 지폈던 미국 워싱턴주립대 마이클 스키너 교수가 2005년 발표한 논문은 학계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임신한 쥐를 화학물질에 노출시켰을 때 태어난 수컷 새끼는 고환이 비정상적이고 정자도 허약한 상태였다. 이렇게 태어난 쥐들끼리 교배를 시켰더니 90% 이상의 3세대 새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됐다. 2세대 쥐들을 화학물질에 노출시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의 논문은 조작으로 2009년 철회됐다가 2년 전, 같은 결과가 다시 발표되면서 학계 인정을 받았다.
지난해 1월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도 비슷한 논문이 게재됐다. 수컷 생쥐를 ‘아세토페논’이라는 화학물질에 노출 시킬 때마다 발에 충격을 주는 실험을 반복했다. 이 쥐는 아세토페논 냄새만 맡아도 스트레스를 받는 반응을 보였는데, 정상적인 암컷 쥐와 교배를 시킨 뒤 태어난 새끼의 대다수도 아세토페논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현상은 새끼의 새끼에서도 공통적으로 관찰됐다. 특정 세대에 나타난 독특한 형질이 세대를 거쳐 발현된 셈이다.
사람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발표됐다. 1944년 9월 독일군은 네덜란드 북서부 지역을 지배하면서 식량봉쇄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이 지역 사람들은 하루에 1000kcal밖에 섭취를 못했다. 1945년 2월에는 580kcal까지 떨어졌다. 당시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출생 전 기근을 겪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비만, 고혈압, 당뇨병 등에 걸릴 확률이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자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던 질병들 중 상당수가 특정 세대가 노출된 환경에 의해 발현됐다.
흡연도 DNA의 비정상적인 발현을 일으킬 수 있다. 남성 흡연자의 경우 비흡연자와 달리 정자에 있는 DNA가 비정상적으로 발현될 확률이 높다. 쥐 실험 결과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발현된 DNA는 세대를 거쳐 유전될 수 있으며 비만, 당뇨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낙농업이 발전하면서 유제품 수요가 늘고, 우유를 많이 마시게 된 민족은 어른이 된 뒤에도 락타아제 유전자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돌연변이를 지닌 구성원 수가 늘어난다. 낙농업이 발달한 영국과 북유럽 국가 주민들 유전적 구성을 살펴보면 이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비율이 90%를 넘는다. 우유를 마시는 습관이 없는 일본, 남부 아시아국가 성인들에게서 이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
물론 후성 유전학과 라마르크가 주장한 용불용설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이야기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라마르크가 말한 유전은 행위에 의해 얻어진 형질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라며 “후성유전학에서 말하는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후성유전학 연구가 시작되면서 비슷한 주장을 했던 라마르크의 이름
[원호섭 기자 / 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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