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8일 오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보트로 15분 정도 이동한 곳에 떨어진 조용한 해역. 김일찬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해양조사팀 행동대원의 낚시바늘에 묵직함이 전달됐다. 바위 틈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급하게 릴을 감았다. 순간 보트에 타고 있던 대원들 모두 놀라 뒤로 넘어졌다. '괴물'을 연상케 하는 길이 50cm크기의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해양대원은 곧장 보트를 돌려 기지로 돌아왔다. 해양대원을 기다리던 김진형 극지연구소 극지유전체사업단 선임연구원은 괴상한 물고기를 보자마자 "유레카"를 외쳤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남극에 '선상낚시(트롤)' 배를 보유한 국가 외에는 거의 잡힌 적이 없는 '남극 검은 지느러미 빙어(남극 빙어·Chanichthyidae Icefish)' 였다.
남극 빙어는 1960년대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왔다. 하지만 바다속 깊은 곳에 서식할 뿐 아니라 움직임이 거의 없어 낚시로 잡기 어려웠다. 김진형 선임연구원은 "배에 있는 지느러미 두개를 해저 바닥에 대고 가만히 있기 때문에 만져보지 않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움직임이 적다"며 "과거 누가 잡았다더라 하는 소문만 무성했다"고 말했다. 연구진이 남극 빙어를 해부하자 뱃속에 '알'이 꽉 차있었다. 김진형 선임연구원은 "아마 산란할 곳을 찾기 위해 수심이 낮은 해역으로 이동하다 잡힌 것 같다"고 했다.
남극 빙어는 특별하다. 척추 동물 중 유일하게 피가 '하얀색'이다. 이유는 '헤모글로빈'에 있다. 척추동물의 피가 선홍색인 이유는 적혈구에 존재하는 색소 단백질인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해 척추동물의 몸 곳곳을 이동하며 산소를 공급한다. 남극 빙어는 헤모글로빈의 양이 일반 척추동물의 10분에 1에 불과하다.
남극 빙어가 우윳빛깔 피를 갖게 된 것은 남극의 특수한 환경과 연관이 있다. 영하2~영상2도에 불과한 차가운 남극 바다에는 산소가 풍부하다. 기체의 용해도는 온도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마치 차가운 콜라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녹아 있어 청량감을 더 느끼는 것과 같다. 산소가 풍부한 곳에 살다보니 굳이 헤모글로빈의 양을 늘리는데 에너지를 쓸 이유가 없다.
남은 에너지를 심장으로 보냈는지 남극 빙어의 심장은 같은 크기의 물고기와 비교했을 때 세배 이상 크다. 심장이 큰 만큼 한번 박동할 때 더 강한 힘으로 혈액을 온 몸으로 보낸다. 물속에 있는 산소를 최대한 많이 흡수하기 위해 마치 공룡처럼 입이 크고 턱이 발달했다. 현재 극지유전체사업단은 남극 빙어의 전체 유전체 해독을 진행하고 있다. 김진형 선임연구원은 "과거 미국에서 유전체 해독을 한 적이 있지만 조직별, 장기별로 상세하고 세밀한 유전체 지도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괴상한 생물처럼 보이지만 남극 빙어의 유전체 해독이 끝나면 인류는 골다공증이나 빈혈 등과 같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남극 빙어는 '부레'가 없다. 다른 물고기처럼 헤엄치기 위해 남극 빙어가 선택한 것은 뼈를 가볍게 만드는 것. 결국 남극 빙어는 골다공증 환자다. 일반 물고기와 달리 뼈가 연골처럼 삭아있는 셈이다. 또한 헤모글로빈이 부족한 만큼 만성 빈혈증 환자이기도 하다. 김진형 선임연구원은 "인간과 물고기의 유전적 차이는 단지 2%에 불과하다"며 "골다공증과 빈혈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으면 관련 질병을 치료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에 있는 한국 과학자들은 낚시로 해양 생물을 잡아 조사해 왔다. 간혹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남극에 있는 독특한 생물을 채집하려면 현재로서는 다이버 외에 이 방법 밖에 없다. 그나마 올해 1월, 세종기지 내에 냉각기를 구비한 아쿠리아리움인 '세종아쿠아존'을 구축해 남극에서 잡은 생물을 오랫동안 보관하며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횟집이나 낚시꾼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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