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통에 남아있는 케첩을 쥐어 짜도 내용물이 빠져나오지 않아 고생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하버드·MIT 등의 세계 최고 과학자들은 '케첩통에 남은 내용물을 깔끔하게 짜내는' 이 사소한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치열한 '발명 경쟁'을 벌여 왔다. 이 가운데 버지니아공대 연구진이 플라스틱 용기를 가지고 이 문제를 가장 저렴하게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연구진은 케첩통 등 플라스틱 포장용기의 표면을 미끄럽게 유지해 내용물이 잘 빠져나오도록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며 이 같은 성과를 지난 3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했다. 용기 표면에 기름을 코팅하는 방식으로 통 속에 담긴 소스나 조미료, 음료, 유제품, 육가공품 등 내용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털어내는 혁신 기술이다. 이를 통해 음식물 쓰레기와 소비자 불편을 크게 경감시킬 수 있게 됐다는 게 연구진 설명이다.
이 연구는 기존 산업용 포장이 용기에 달라붙은 음식물을 남기게끔 해 다량의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는 문제 의식에서 시작됐다. 라닛 무케르지 버지니아공대 연구원은 "용기에 남아 있는 찌꺼기는 단순히 사용자에게 불쾌감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매년 수백만 파운드에 이르는 음식물 쓰레기를 생산한다"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은 화학적으로 잘 섞이지 않는 식물성 오일을 플라스틱 용기 표면에 코팅해 케첩처럼 끈적끈적한 식품도 깨끗하게 떨어지도록 해준다. 또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처럼 저렴하고 이미 다용도로 보급된 플라스틱에 적용할 수 있다.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등 탄화수소 기반 폴리머는 전 세계 플라스틱 수요의 55%를 차지하는 소재며, 재활용도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기술계와 산업계는 버지니아공대의 특허 기술이 가장 먼저 실용화에 성공할 것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유수의 대학이 이처럼 포장용기를 미끄럽게 만들어 음식물 낭비를 줄이려는 연구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케첩 용기만 따져봐도 시장규모가 무려 170억달러(약 20조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매년 버려지는 케첩 소스만 100만톤에 달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2011년에는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이 용기 표면을 미세한 정도로 거칠게 만들어 그 틈새에 오일을 붙들고 있게 하는 방식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유지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실리콘 및 불소 기반의 폴리머를 소재로 사용해 가격이 비싸다는 한계가 있었다. 곧이어 2012년에는 MIT 연구진이 초현대적 물질인 '리퀴글라이드(LiquiGlide)'라는 특수 코팅을 개발해 케첩이 손쉽게 흘러나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후발주자인 버지니아공대 기술의 가장 큰 경쟁력은 '경제성'에 있다. 값싼 탄화수소 기반 폴리머를 사용해 여러 산업분야에 응용할 만큼 실용성이 높다는 것이다. 연구의 공동저자인 조나단 보레이코 조교수는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표면을 인위적으로 거칠게 만들지 않고도 플라스틱에 잘 코팅되는 오일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진다"며 "자연 그대로의 오일을 사용해 안전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나아가 연구진은 이 기술이 단순히 산업용 식품 가공과 포장 외에 제약업계에서도 광범위한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오일을 주입한 플라스틱은 자연적으로 박테리아의 결합과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에 무균 의약품 용기 등을 만드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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