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이 일군 대우의 흥망성쇠는 한국 경제의 커다란 한 축이다. 매일경제신문은 고인과 대우를 어떻게 지켜봐 왔을까. 그 궤적을 따라가보자. 70년대부터 1999년까지 매경에서 다룬 대우 관련 주요 기사를 살펴봤다.
故 김우중 회장이 대우실업을 창업한 게 1967년이니, 창업 3년을 맞아 회사를 옮긴 모양이었다. 매경에서 대우의 첫 등장은 '사무실 이전' 단신이었다.
1984년 4월 9일자 매경 7면에 고인이 대학생들과 자유토론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잠깐 기사를 통해 고인의 말을 다시 보자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지낸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바로 나라가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강은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형태는 자연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 이런 형태의 경영은 한 시기의 역사적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부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멋진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1986년 6월 대우가 새로 개발한 승용자 '르망'을 발표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2년 전 착수한 이른바 '월드카' 개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날 신차 발표회는 당시 김만제 부총리, 금진호 상공부 장관, 워커 주한미국대사 등 각계인사 50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
1987년 4월. 대우가 창업 20주년을 맞아 계열사 독립경영체제 확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그룹 경영 청사진을 밝혔다는 내용이 주요 기사로 다뤄졌다. 29개 계열사중 (주)대우를 제외한 28개사를 종업원 지주제로 전환해 자립경영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내용이다.
1989년 1월 7일자 3면에 당시 김우중 대우 회장의 전면 인터뷰가 게재됐다. 신년 기획 '21세기를 연다 - 기업재구축' 시리즈의 일환인 것 같다. 이 인터뷰에서 고인은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에 주력하겠다며 특유의 '세계경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또 자동차·전자·항공·금융에 주력하며 대우조선 정상화 의지도 밝혔다.
1990년 11월 24일자 15면. 안타까운 소식이 사회면에 작은 1단 자리를 차지했다. 고인의 장남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1991년 12월, 대우가 자동차사업 파트너인 미국 GM과 결별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자동차 해외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군산공장에서 상용차와 승용차 동시 생산을 검토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대우의 자동차사업 홀로서기 선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출발한 대우자동차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다시 GM에게 넘어가게 된다.
1992년은 대통령 선거가 열린 해였다. 이 선거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통일국민당 후보로 정치 참여를 선언하면서 정계와 재계 일대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고인도 정치 참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매경은 대선을 불과 한달여 남긴 1992년 10월 28일자 1면에 '김우중 파문 재계 강타'라는 톱기사를 실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파문은 바로 가라앉았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기자회견을 열고 경제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정치 참여설을 일축했다.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1월 1일. 대선이 끝나고 새해가 밝았다. 매경은 신년호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새아침의 당부'를 1개면 전체를 할애해 실었다. 고인은 기고문에서 "제조업을 키우지 않으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며 제조업 확장에 공을 들였다.
1996년 3월 15일자 매경 1면. 대우의 '유럽 경영'이 본격화한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올랐다. 일본, 프랑스 기업과의 제휴, 영국 자동차업체 인수 등 굵직 굵직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우의 '세계 경영'이 정점을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이면에 '유동성 위기'라는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22일자 13면. 김우중 대우 회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 김 회장은 "부실기업 도산과 수출부진 등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곧 수출경쟁력이 회복돼 내년에는 국제수지가 정상화할 것"이라며 우리 경제에 대한 낙관과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1997년 9월 17일자 매경 1면에 김우중 회장이 다시 등장했다. 대우그룹 회장이 아니라 전경련 회장으로서였다. 고인은 "국가적 경제위기 속에 중책을 맡게 돼 막중한 사명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고인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김대중 정부 경제 관료들과 갈등하며 '대우 해체'의 골을 키웠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1999년 11월 2일자 매경 1면. 김우중 대우 회장이 사퇴하고 경영 일선에서 완
[최용성 매경닷컴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