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합정동 한 카페에서 정란을 만났다. 새 앨범 ‘노마디즘’(NOMARDISM)을 들고 나타난 그녀의 첫인상은 음악이 주는 카리스마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청순했다.
선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끌어 가나 싶더니 본격적으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 눈매가 달라진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보통이 아니다’ 싶다.
실제로 정란은 지난 10년간 국내는 물론, 유럽, 일본, 파리, 뉴욕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 온 실력파다. 라틴 밴드 로스아미고스, 탱고 프로젝트 그룹 라 벤타나의 객원보컬로 활동했던 그녀는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 재즈크로스오버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과 담께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 메인 무대에도 섰다.
그런 의미에서 ‘노마디즘’은 정란이 자신의 이름으로 내놓은 솔로 음반으로는 처녀작이지만,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경험과 내공이 응축돼 담겨있는 수작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앨범 타이틀 ‘노마디즘’은 지금까지 걸어온 정란의 음악 여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아티스트의 숙명이기도 할 유목이라는 단어를 첫 앨범에서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자신감과 당당함에 평단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다.
솔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특별하진 않다. “그동안 해온 음악을 정리할 타이밍”이었다는 설명이 더 적절하겠다. 정란은 이번 앨범에 대해 “데뷔한지는 몇 년이 흘렀지만 내 온전한 솔로앨범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내게는 굉장히 의미가 큰 음반”이라며 “이전 작업해온 것들의 집합체를 더 조금이나마 나의 현재로 담아낼 수 있던 것 같다” 했다.
앨범은 총 13곡의 자작곡으로 채워졌다. 타이틀곡 ‘수중 고백’, ‘나의 용서’를 비롯해 ‘관람’, ‘몽유’ 등 다수의 곡들은 여러 가지 사운드가 리드미컬하게 때로는 나른한 듯 몽롱하게 합쳐져 있다. 흡사 다양한 재료가 적재적소에 들어가 잘 배합된 요리 같기도 하다.
이에 정란은 “특별한 정해진 레시피가 있거나 정확한 계산에 따른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요리와도 어떤 면에선 통하는 듯 하다”고 설명했다.
흡사 한 편의 시 같은 가사도 인상적이다. 정란은 “제목이 곡 안에 들어간 게 하나도 없다”며 빙긋 웃었다. “곡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단어를 제목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듣는 이가 접하고 느끼는 대로 곡을 이해하게 되는 거죠. 너무 다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알지 못하는 채 보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앨범 프로듀싱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재즈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루벤 사사마가 맡았다. 그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거장 음악학자 레이오 사마마의 아들로, 헤이그 왕립음악원과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재즈 퍼포먼스를 전공한 베이스 연주자다.
정란은 루벤 사사마에 대해 “훌륭한 프로듀서”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프로듀싱을 100% 신뢰하고 따라갔다”고 말했다. 루벤 사사마와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음색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그녀의 ‘유레카’는 앨범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1번부터 13번까지, 통로가 있어요. 하나로 흐르는 무언가가 있죠. 악기는 다르지만 톤이나 스트링 배치 등 전반적으로 공통적인 게 있어서 모호하기도 하면서도 통일성도 있죠. 하나하나 이야기하려면 뭔가 ‘(이야기 할) 꺼리’가 없어 보이는 거죠. 하지만 듣다 보면 느껴지실 겁니다.”
오히려 정란은 “모호하다는 반응이 너무 좋다”고 했다. 그는 “가령 ‘누구 같다’는 얘기만 들린다면, 그건 신선하지 않다는 거니 끝난 것 아니겠나”며 “그래서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음악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접하게 됐다. 시인이자 국어 교사이던 그의 고3 담임선생님은 졸업을 앞둔 정란을 재즈바에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노래를 부른 게 시작이었다.
“학창시절 뚜렷하게 음악에 재능을 보일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웃음).” 스스로 “특별히 튀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그이지만 무언가 예술가로서의 ‘끼’는 타고난 듯 하다. 음악은 물론 사진 작업, 미술에도 깊은 조예를 지닌 그는 연극에도 출연했다. 정란은 “연극에선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뭔가 비밀을 지닌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며 웃었다.
범상치 않은 느낌으로 상대를 끄는 매력. 이쯤 되면 마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언젠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정란. 팔방미인 정란의 ‘노마디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포니캐년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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