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풍자(諷刺)의 사전적인 의미는 불합리한 세태나 권력층의 잘못을 은유적으로 비꼬는 것을 말한다. 서슬 푸른 독재정권 시절 신문의 네 컷짜리 만평은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역모죄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에도 풍자와 해학이 존재했다.
1808년에 태어난 정수동의 본명은 정지윤이었다. 하지만, 수동이라는 호를 붙여서 정수동이라고 불렸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지냈다. 따라서 그도 당연히 역관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혼탁한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에도 권력에 대한 비판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까닥 잘못하면 역모죄로 몰려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재로 알려졌다. 아무리 어려운 문장 한 번만 보면 대번에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를 짓는 솜씨도 뛰어나서 덕분에 그는 중인 신분에 벼슬을 하지 않았음에도 김정희 같은 대학자부터 조두순 같은 권력가까지 두루 알고 지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인맥을 이용해서 벼슬 한자리를 얻으려고 했겠지만, 그는 자유로운 삶을 택했다. 그가 지은 시에서도 이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갑갑한 격식이나 문장을 멀리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시를 썼다. 그저 붓 가는 대로 쓸 뿐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이기도 했다. 재치 있고 위트 넘치는 성격 때문에 익살꾼이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는 불우한 시대를 노래하는 시인이자 예술가였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조와 정조 시대를 지나 본격적인 세도 정치시대로 접어들 때였다. 정수동은 부패한 권력이 백성을 어떻게 괴롭히고 나라를 좀먹는지 똑똑히 보았고, 나름대로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가 늘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아픔을 견디지 못했던 탓이리라.
하루는 세도가인 조두순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던 길이었다. 조두순의 집에 도착하자 때마침 소동이 벌어졌다. 조두순의 손자가 엽전을 삼켰던 것이다.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정수동 만큼은 태연했다.
“괜찮을 것이야. 할아버지가 수만 냥을 꿀꺽 삼키고도 멀쩡한데 그깟 엽전 한 닢 삼킨 게 어때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조두순 앞에서 이런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덕분에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들은 널리 퍼져 나갔다. 하나같이 제 역할을 못하는 양반과 지배층들을 비꼬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가혹한 정치에 신음하던 백성에게 술에 취했으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정수동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후대에 기억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살아가던 시대와 권력에 배척받았다. 개인적인 삶도 불우한 경우가 많았다. 정수동 역시 자초한 가난한 삶 때문에 평생을 고통 받았다. 어린 아들이 갑자기 아팠을 때는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다. 정수동은 죽은 아들이 너무 남루해서 저승에서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까라는 안타까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구를 남기는 것으로 고통을 잠재웠다. 썩어가는 세상을 풍자하며 살아가던 정수동은 술에 취한 채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