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1990년 후반 가수 강수지, 하수빈 이후 여자 솔로가수가 부재 상태였을 당시 가수 양파가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중 “양파의 가창력을 능가할 가수가 등장했다”며 가수 리아가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리아는 발매하는 앨범마다 호평을 얻어내며 성공신화를 얻어냈다. 특히 3집의 타이틀곡 ‘눈물’은 지금까지 리아의 대표곡으로 불릴 정도다. 하지만 이도 잠시, 온갖 지저분한 루머에 휘말린 그녀는 그간의 인기를 뒤로 하고 몸을 숨겼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활동하던 그녀가 최근 SBS플러스 ‘컴백쇼 TOP10’을 시작으로, KBS2 ‘내 생에 마지막 오디션’에 출연하며 재기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크게 화제를 얻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내렸다. 과거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루머에 시달리던 그녀는 이제야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만의 음악을 가지고 다시 대중들을 찾는다.
![]() |
◇ 떡잎부터 달랐던 당찬 소녀의 가요계 데뷔
가수를 꿈꾸던 리아가 처음 가요계 관계자들과 접촉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별밤 뽐내기’에서였다. 이문세, 김건모, 신승훈 등과 만났다. 훗날 이 만남은 그녀의 가수 인생에 발판이 됐다. 심지어 한참 후에 리아로 데뷔한(당시 이 공연에서는 본명 김재원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본명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콧대가 한참 높아졌죠. 사실 이문세 아저씨가 저를 제작하고 싶어 했는데 안타깝게도 투자를 받지 못해서 무산됐어요. 그러다 보니 팬도 생기고 하니 갑자기 기고만장해지더라고요. 집안에서 원하는 대학교도 가지 않고 꿈을 위해 실용음악학원을 다녔어요. 피자 가게, 커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비와 차비를 충당했죠.”
꿈을 위해 수석으로 합격했던 4년제 대학교의 입학도 포기한 그녀는 우연히 데뷔의 기회가 찾아왔다. 친구를 따라 EBS ‘아름다운 세상 커다란 꿈’이라는 프로그램 속 밴드와 함께 한 고등학교에 찾아가 단 한 곡으로 무대를 꾸몄다가 현장을 찾은 매니저에게 캐스팅된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매니저에게 연락을 받고, 생전 처음 오디션을 봤어요. 아무거나 불러보라길래 무반주로 노래를 했는데 바로 제작에 들어간 거죠. 그럼에도 당시 여자 가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아서 솔직히 엄청난 성공을 예상하진 못했어요.”
![]() |
◇ 앨범 발매 족족 대박…인기 절정에서 만난 추한 현실
데뷔 전 그녀는 동물원, 이은미, 박상민 등의 공연 게스트로 섰다가 ‘이소라의 프러포즈’ PD이 눈에 들어 ‘열린 음악회’ ‘이소라의 프러포즈’에 출연하게 된다. 데뷔도 전에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우는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8개월 후 진짜 자신의 이름으로 나온 첫 앨범을 손에 쥐게 됐다.
“프로그램 출연 후 앨범 제작까지 8개월 정도 걸렸는데 이 사이에 팬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앨범을 내고 콘서트를 열었는데 라이브 소극장에서 했는데 거기서 500명의 기록을 세웠어요. 계단이고 뭐고 겨우 껴서 들어오신 거예요. 이때 완전 제 인생에 피크를 찍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최초로 벤을 탄 연예인이었죠.”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외부적으로 보면 그야 말로 대박 신인의 탄생이었지만, 사실상 그녀에게 이 시기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노래를 하고 싶었던 그녀는 스케줄에 쫓겨 그야 말로 ‘스케줄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성장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럴 여건이 안됐죠. 지방을 왔다갔다, 하루에 8개씩 행사를 뛰었어요. 매일 먹는 건 햄버거와 김밥이고 모든 생활을 거의 차에서 해결했죠. 화장실도 못갈 정도였으니까요.”
더 큰 문제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성대 결절이었다. 사실상 당시 모든 방송을 접은 듯 보였지만, 지방행사는 계속됐다. 목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목을 쓰니 회복이 더딘 건 당연하고, 무대에서 자신감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2집과 3집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소속사와의 불화로 인해 전세금 정도의 수익 외엔 리아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심지어 마약 혐의를 받고 수차례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며 20대 소녀가 겪지 말아야할 일들을 너무 일찍 경험했다. 물론,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또 한 번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폭력혐의에 휘둘리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가수로서 절정의 시기에 세상에 등지고 숨어버렸다.
“저의 삶은 진짜 바닥이었어요. 어떤 날은 차비가 없어서 성수대교에서 영동대교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어요.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알아보니까 그것도 쉽지 않았고요. 그 이후로 트라우마가 한참 갔어요. 그게 한 10년은 가더라고요. 자다가 일어나고 숨이 가빠져서 잠을 잘 수 없었어요.”
![]() |
◇ 어렵게 얻은 자유, 초심으로 돌아간다
모든 상처를 지우진 못했지만 그녀이 생활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여행을 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후에야 조금 일어설 힘이 생긴 터였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앨범을 냈지만 소속사가 공중분해 되고, 제대로 된 홍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생활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실용음악학원을 세우고, 아버지의 여행 아이템을 바탕으로 한 여행사도 차리면서 자신의 음악을 위한 준비를 해왔다. 지난 1월 ‘심장이 울어요’를 발매하며 다시 한 번 날갯짓을 시작한 셈이다.
리아는 방송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을 팬들에게 보여주며, 과거 가수를 꿈꿨던 그 열정을 고스란히 내뿜을 예정이다. 그 첫 시작은 신중현의 음악들을 재편곡해 클럽투어에 나서는 것이다.
아, 그리고 40대에 접어 든
“좋은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워낙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음악들, 그리고 생활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해야죠.”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 트위터 @mk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