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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째 음원 차트 1위를 오르락내리락 중인 가수 김동률의 '그게 나야' 노랫말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 한때 외계어와 영어가 난무하던 가요계에 순우리말로 이뤄진 아름다운 가사가 사랑받는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아주 시(詩)적인 은유는 부족하지만 전체적으로 무리한 영어 가사는 없다. '그게 나야'를 이어 상위권에 올라 있는 소유X어반자카파의 '틈', 에일리의 '손대지마', 포스트맨의 '신촌을 못가', 서태지 작사·작곡 아이유의 '소격동' 등 대부분 곡에도 비교적 영어 사용이 자제됐다. 아주 적은 문구의 추임새 정도 영어가 쓰였을 뿐이다.
9일 국내 최대 점유율 음원 사이트인 멜론 실시간 차트를 보면 1위부터 10위까지 아이돌 그룹의 곡이 실종됐다. 30위까지 들여다 보니 씨스타의 '아이 스웨어(I SWEAR)'가 22위, 소녀시대 유닛 태티서의 '할라(Holler)'가 26위에 간신히 이름을 올렸다.
감성의 계절, 가을인 탓도 있겠으나 아이돌 그룹 위기설이 대두된지 오래인 형편이다. 지난해 데뷔한 아이돌 그룹은 알려진 것만 50여 팀. 불과 3년 전 100여 팀이 데뷔했던 점을 떠올리면 절반 수준이다. 이들 중 살아남는 이는 4~5팀에 불과하다.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음원 차트 상위권에서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는 맥락과 연관이 없지 않다.
다수 가요 제작자들은 앞으로 아이돌 그룹의 나아갈 방향을 찾느라 고심이 깊다. 몰랐던 것이 아니다. 트렌드는 바뀐다. 2007년 데뷔한 소녀시대·원더걸스·카라 등이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그리는 중이다. 후크송 열풍과 고민이 필요 없던 가사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가요 시장의 이른바 ‘5년 주기설’이 떠오르기도 한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중략)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2004) 노랫말이다. 한글날(10월9일)을 맞아 카카오뮤직과 문학과지성사가 시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뽑힌 곡이다. 노래가 발표된 지 10년이 됐음에도 아직 많은 이가 찬사를 보내는 곡이다. 이 정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변했다. 직설적이다. 시(詩)가 되는 노래가 드물다.
다만 시장에서 주류로 자리매김한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노랫말로 사랑받진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여전히 퍼포먼스·외모·멜로디·주제가 신선하냐 아니냐일 뿐이다. 옛 가요처럼 노랫말의 깊이가 없다. 그들의 노랫말만 떼놓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많다.
가요 제작자들은 “이제 아이돌 그룹의 음악도 감성을 자극하는 노랫말과 어우러져야 할 때가 왔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글로벌 시대에 언어나 노랫말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있다. 그러나 의미 전달에 있어 노랫말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래 제목을 강조하거나 가사의 운을 맞추기 위해, 혹은 그저 좀 멋있어 보이려고 영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손병룡 ‘타임 포 키즈(TIME for Kids)’ 선임연구원은 “노래가 시와 같은 역할을 해서 감정 표현을 축약할 수는 있겠으나 전체적인 맥락이나 용례에 대한 고려 없이 마구잡이식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케이팝의 세계화에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제적 망신”이라고 말했다.
가수 윤종신은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은 오디오에 자극하는 것이지만 머리와 가슴 속에 그려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법보다는 화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감’의 힘이다. 진정성 있는 노랫말은 곡의 몰입도를 높이고 음악 팬들과 노래를 통한 더욱 끈끈한 공감대 형성을 가능케 한다. 얼굴없는 가수 애드나인프로젝트는 "가창력이나 음악적 완성도가 부족하더라도 가사가 주는 울림이 크면 감동이 배가 된다"고 말했다.
양현석이 수장인 YG엔터테인먼트 소속 남매 듀오 악동뮤지션은 신곡 ‘시간과 낙엽’을 10일 발표한다고 예고했다. 그러면서 한글로만 쓰여진 가사라고 홍보했다. 한글날을 맞은 홍보팀의 감각적인 전략이었겠지만,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가요가 순우리말로 이뤄진 게 '뉴스'가 되는 시대였던 셈이니 말이다. 어찌 됐든 순우리말로 이뤄진 노래가 많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다수 아이돌 그룹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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