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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의 말은 느릿하다. 어눌하게 들릴 수 있는 말투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무슨 말인지 파악할 수 있다.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자기 생각과 주관은 뚜렷하다. 지난 17일 임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 언론시사회에서도 그랬다.
수많은 작품을 연출했으면서도 임 감독은 김훈 작가의 글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면서 연출 의도와 화장실 신 등 취재진의 궁금증에 대해 언제나 그랬듯, 차분하게(느릿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특히나 취재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오상무(안성기)의 죽어가는 아내를 연기한 여배우 김호정이 화장실 신에서 보여준 모습을 칭찬할 때였다.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와 연정을 품고 있는 젊은 여자 추은주(김규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한 중년 남자 오상무의 이야기를 다룬 ‘화장’에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쇠약한 아내는 용변을 처리하지 못해 남편에게 도움을 받고,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남편에게 수치심과 함께 미안함을 느낀다.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남자의 심리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아내의 상황이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장면에서 김호정은 전신을 드러냈고, 성기 노출까지 했다. 사실 임 감독은 처음에는 전신 노출을 생각하진 않았다. 관객이 상황을 유추하게 하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감 있게 전달될 것 같지 않았다. 여배우에게 양해를 구했고, 김호정의 3시간의 고민 끝 제안에 응했다.
임 감독은 여전히 느릿한 말투로, 또 길게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부인을 수발하는 과정이었다. 상반신으로만 관객이 유추한다고 해도 내 의도가 전달될 것 같지 않았다”며 “전신을 찍을 때 추함이 드러나면 감독으로서 큰 실례를 범한다는 생각을 했다. 무사하게 목적한 대로 잘 찍혀 영화를 빛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 자리를 빌려 김호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더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된 ‘화장’의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었는데, 몇 번을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듯 이번에도 김호정을 향한 고마움을 표했다. 배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김호정은 노장의 말에 결국 또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김호정은 실제 암투병했다. 누구도 그 상황에 부닥치지 않았다면 모를 죽음의 공포를 다시 한 번 표현해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겨웠을 텐데, 여배우는 다시 리얼하게 해냈다. 전신 노출까지 감행했다.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부산에서 김호정은 투병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 들었다고 하여 자만하기 쉽고, 양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특혜를 주지 않는 것에는 호통을 치는 어르신들을 꽤 많이 본다. 임 감독은 여배우의 연기에 고마워할 줄 아는 것 같다. 뜨기 위해 벗은 게 아닌(설사 그렇다 해도) 여배우의 고충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계 큰 어른, 멋져 보이지 않는가. 그 때문인지, 여배우의 연기가 한낱 가십거리로만 비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
jeigu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