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국내 드라마에서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들이 있다. 바로 불치병과 죽음이다.
MBC 주말드라마 ‘장미빛 연인들’는 남편 영국(박상원 분)과 신뢰했던 신애(이미숙 분)의 외도에 배신감을 느끼며 복수하는 연화(장미희 분)의 모습을 그렸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영국과 신애를 괴롭힌 연화였지만, 결국 덜미를 잡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반격에 나서려던 순간 연화는 모두에게 고백한다. “나 췌장암 말기에요.”
극 중 불치병 환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만큼 전개에 긴박감을 주며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끌어 낼 뿐 아니라, 때로는 갈등해결에 있어 가장 쉽고 간단한 지름길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병을 통해 다양한 극전개가 가능해지며, 급격한 발병은 극을 순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앞서 언급한 ‘장미빛 연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극중 연화의 암투병 고백 이후 연화는 악행을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화해와 화합을 이루며 전력이 탄력을 더한 것이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불치병 혹은 죽음은 ‘장미빛 연인’ 뿐 아니라 그동안 안방극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 해결구조이자 접근 방법이다. 실제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의 작품을 조사한 결과, 대략 60여개가 넘는 작품에서 암과 같은 불치병을 주요 소재로 다루었었다. 평균적으로 시청자들은 1년에 평균 6편의 드라마에서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불치병과 한국 드라마를 따로 때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가운데, 실제 드라마와 현실은 얼마나 똑같고, 얼마나 다른 것일까.
드라마가 현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작년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 질병 중 하나가 암이다. 지난 2013년에 대한민국에서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총 75,334명, 이는 전체 사망자의 28.3%에 달하는 수준이다.
세계와 비교해 보았을 때도 국내의 암발생률은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 중 위암의 발병률은 세계 1위 수준의 속할 만큼 높았다. 그렇다면 실제로 현실에서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으니, 현실을 투영하는 드라마 역시 암에 걸린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리 특별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의학의 발전에 따라 높은 암발생률만큼 최근 암 생존력 역시 높아졌다는 것을 반영하지 못한 채, 드라마에서 치료 가능성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3~1995년 암 발생 생존율이 41.2%(국립 암센터, 이하 동일)에 달했다면 2008~2012년의 생존율은 무려 68.1%가 올랐다. 26.9%가 증가했지만, 여전히 드라마 속 암 발생 생존율은 1993년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다보니 안방극장 속 환자들은 어떻게 하면 치료에 전념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하기 보다는, 얼마 안 있어 자신은 죽을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잘 이별하고 생을 정리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삶을 체념한다는 것이다. 등장하는 의사 역시 작가가 이미 주인공을 죽는 것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인지 적극적인 치료 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죽어가는 환자를 방관하는 수준이다.
즉 쉽게 말해 환자의 삶에 배려와 인생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이, 단순히 암 발병률과 사망률이 높으니 드라마에 적용하겠다는 태도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다. KBS2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는 위암 말기라는 위독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가족만 걱정하는 아버지 순봉(유동근)과 ‘불효소송’을 일으킬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세 남매 강심(김현주 분), 강재(윤박 분), 달봉(박형식 분)이 아버지의 건강과 진심을 알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다. 끝끝내 순봉은 죽었지만, 불효에 대해 후회하는 삼남매의 모습과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가족들의 모습 등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SBS 드라마 ‘펀치’에서는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며 앞만 보고 살아온 남자 정환(김래원 분)에게 뇌종양과 더불어 6개월의 시간이 부여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이후 잘못 살아온 자신에 대한 참회이자 자신의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위해 잘못됨과 맞서는 정환의 치열함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두 드라마는 불치병이 단순히 자극과 충격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과정을 그리면서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작년 방영된 MBC ‘오로라 공주’에서는 갑자기 설희(서하준 분)가 혈액암(백혈병)에 걸렸다는 뜬금없는 설정에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어이없는 대사와 로라(전소민 분)가 키우던 떡대가 대신 죽으면서 설희의 병이 완치 됐다는 이른바 미신적이고 비상식적인 과정들을 그리면서 빈축을 샀었다.
앞서 언급했던 ‘장미빛 연인들’에서 연화의 갑작스러운 췌장암 역시 영국과의 화해를 위한 수단이자, 연화에게 면죄부를 쥐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외에도 극의 중심 내용과 엇나가는 갑작스러운 억지스러운 극중 인물들의 불치병 설정은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해 볼멘소리가 가장 크게 나오는 곳은 병원 측, 더 정확히 말해서는 환자 측이다. 과거 소아백혈병으로 자신의 아이를 묻어야만 했다고 밝힌 한 보호자는 “드라마를 보면 작가들이 너무 쉽게 표현해서 너무 아쉽다. 드라마를 보고 환자와 보호자가 받을 영향 너무 큰데 쉽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드라마가 하고 있는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순간에 드라마의 전개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저런 병명을 밝히고 병에 걸린 사람은 죽어야만 하고, 한 가닥 희망도 없는 시한부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절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속상한 마음을 전했다.
또 다른 보호자는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시간 만큼은 드라마 내용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드라마의 환자와 같은 병명의 환자가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환자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달라는 것”이라며 “건강한 사람들은 배우가 울부짖으며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연기를 보며 연기 잘한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다. TV를 보며 여유가 필요한 시간 오히려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한 병원 관계자는 “병원생활은 무료하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나 환자 가족들은 휴게실이나 병실에 있는 TV를 보며 시름을 달래며 웃을 때가 많다”며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한 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간혹 드라마에서 잘못된 치료 정보나 부정적으로 그려질 때가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 더 밝고 긍정적인 내용의 작품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