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 백야’를 관통하던 ‘순리’라는 말은 막장을 넘은 괴작(怪作)의 대모 임성한 작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나 보다. 최고의 장점이자 최후의 무기인 시청률마저 놓치고, 방송사로부터 외면을 당한 임성한 작가는 결국 ‘순리’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압구정 백야’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순리대로 살라’다. ‘압구정 백야’를 통해 임성한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순리대로 살기’라는 것인지, 순리라는 단어는 극중 인물의 입을 타고 끈질기게 따라온다. 양아들인 나단(김민수 분)과 결혼하려는 친딸 백야를 보며 은하는 “순리에 맞지 않은 결혼”이라고 반대했었고, 이후에도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백야를 보며 “네가 순리대로 하지 않아서 나단이 죽은 것이 아니냐”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이 순리라는 말은 아이가 있는 과부 효경과 총각 선중이 주위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을 할 때도 등장했으며, 이후에도 각종 갈등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극중에서 사용돼 왔다.
지난 21일 방송된 ‘압구정 백야’는 교통사고 이후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병원에 입원한 백야와 삼희(이효영 분)를 그렸다. 교통사고가 있기 전 백야는 화엄에게 향하는 마음을 접기 위해, 삼희는 지아(황정서 분)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약혼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하늘이 백야와 삼희의 약혼을 반대하듯 이들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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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서로가 향한 인연이 누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야와 삼희는 병실에서 앞서 했던 약혼을 취소하기로 결정한다. 백야의 병실을 찾은 삼희는 다쳐서 누워있는 그에게 “우리 이제 순리대로 살자. 물 흐르는 것처럼. 누구든 물살은 거스를 수 없는 거지 않으냐. 화엄이 더 이상 안 힘들게 했으면 좋겠다. 서로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 둘의 만남은 하늘이 정한 인연이 아니니 순리 각자 정해진 인연에 맞게 살아가자는 말이다.
순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순한 이치나 도리. 또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함’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자연의 정해진 질서와 법칙에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작품 자체가 문제작인 ‘압구정 백야’가 순리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모순적인 캐릭터들이 외치는 순리가 과연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 순리가 맞는 지 헷갈릴 정도다.
자기 자식을 버리고 부잣집에 재혼한 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백야 앞에서 순리 타령을 하는 은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것’과 거리가 멀고, “백야가 순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단이 죽었다”는 그를 몇 십년간 친자식처럼 키웠다는 엄마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런 여자에게 홀딱 반해서 몇 십 년을 잉꼬부부로 살다가 갑자기 고향 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바로 이혼을 하는 남편, 사랑밖에 난 몰라서 자살을 시도하는 화엄, 친구가 형님으로 들어오는 게 싫어 각종 이간질을 해대는 선지(백옥담 분) 등 모든 것이 비상식적이다.
임성한 작가가 그리는 황당한 설정들이 재미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데스노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극중 인물을 돌연사 내지는 교통사고로 죽이는 것은 상당히 비도덕적이며, 사람의 목숨을 놓고 시청자들과 밀당 아닌 밀당을 하는 것 또한 시청자들에게 있어 상당히 피곤할 뿐이다. 여기에 ‘압구정 백야’가 임성한 드라마의 ‘자기복제’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어아가씨’ ‘오로라 공주’ ‘하늘이시어’ 등 임성한 작가의 전작들의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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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압구정 백야 캡처 |
이에 지친 시청자들은 ‘압구정 백야’를 떠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시청률에서도 잘 드러난다. 논란은 있을지언정 뜨거운 화제 속 20%대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임성한 작가였지만 현재 ‘압구정 백야’의 시청률은 13~14%에서 맴돌고 있다. 2월4일 방송됐던 80회 시청률인 16.0%(닐슨코리아, 전국기준)가 ‘압구정 백야’의 자체최고시청률이라는 것만으로도 ‘시청률 메이커’ 임성한 작가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지난 3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위’)로부터 받았던 ‘프로그램 관계자 징계’ 철퇴까지 가중되면서 굳건할 것만 같았던 ‘임성한 월드’는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당시 지적을 받았던 내용은 친딸을 며느리로 맞게 되는 상황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가 사실상 친딸인 며느리에게 “버러지 같은 게” “부모 없이 큰 게 자랑이고 유세야” 등의 폭언과 함께 얼굴에 물을 뿌리고 따귀를 때리는 등의 장면과, 결혼식 직후 맹장염에 걸린 어머니의 병문안을 간 나단이 깡패들과의 시비 끝에 벽에 머리를 부딪쳐 눈을 뜨고 사망하는 장면 이었다.
임성한 작가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이자 고향과도 같았던 MBC 마저 등을 돌렸다. 22일 진행됐던 방통위소위원회 회의에서 “드라마 작가들은 현재작이 끝날 때 차기작 계약을 하는데 임성한 작가와는 현재 계약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약을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MBC의 공식입장을 알린 것이다.
모두가 등 돌린 상황에서 임성한 작가는 순리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임성한 작가가 전부터 측근들에게 열 번째 작품까지만 활동하고 더 이상 집필을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수고의 박수 보다는 등 떠밀 듯 밀려나가는 느낌이 강하다보니, 임성한 작가의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방송되는 내내 설득력이 없었던 작품처럼 말이다.
순리 없이 살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급하게 순리를 찾는 임성한 작가, 모든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