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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그의 목소리를 크게 반겼다. 막연히 짐작하는 추측 이상이다. 시장 상인들에게 그의 노래는 천군만마다. 수 백 수 천 번을 반복해 들어도 흥겹다. 장단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흥얼대다 보면 절로 힘이 난다.
화개장터의 얼굴 마담 '어우동 엿장수'는 "손님들도 좋아한다. 이 노래 덕에 장사가 더 잘 되는 것 같아 계속해 틀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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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꾸며진 무대가 아닌, 길바닥이나 다름 없는 낮은 곳에서 그가 노래를 부르자 상인과 손님은 한 데 어우러져 신명 나는 춤을 췄다.
◇ 태진아에게 장터는 애달픈 현실이자 달콤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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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이면 개울 하나 건너 장터에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살았다. 뻥튀기 아저씨 옆에 붙어있으면 튀밥을 주워먹는 재미가 있었다. 제대로 된 건 돈이 없으니 못 사먹었다. 그렇게 장터를 뛰어다니다가 동네 부자 어르신을 만나 배꼽인사하면 눈깔사탕을 얻어먹곤 했다."
그 시절 대부분이 가난했다. 그의 집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무를 구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나무가 없으면 불을 뗄 수 없었다.
"십리 이십리 길을 가야 했다. 뚝 위 풀까지도 긁어다가 말려서 태웠을 정도였다. 나라는 나무 심기를 장려하고, 학교에서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송충이를 잡아오면 강냉이 가루를 주던 시절이다. 어린 놈(본인)이 나무를 해봐야 얼마나 했겠는가. 떨어진 나뭇가지라도 주으려면 해뜰 때 나가서 해질 때 들어와야 했다."
배가 고팠다. 칡뿌리를 캐먹고 도토리로 묵을 쑤거나 보리와 섞어만든 빵(떡)으로 배를 채웠다. 벼를 벤 논에 있는 올뱅이(다슬기의 방언)와 미꾸라지는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는 좋은 영양분이었다.
◇ 가난은 태진아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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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을 먹어봤고, 돈의 소중함을 알았다.
"내가 있는 이유다. 지금도 난 투기는 하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일단 은행으로 간다. 투자가 무조건 허황된 짓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큰 욕심이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않은가."
열 네살, 중학교를 가야할 나이에 상경한 그는 중국집 배달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이후 구두닦이 등 서른 일곱가지 직업을 가졌다. 시장도 그의 삶터 중 일부였다. 시쳇말로 'X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서울에 올라와 일자리를 구한 뒤 바로 적금을 들었다. 푼돈은 시골에 가져가봐야 부서졌다. 밭도 논도 없는 집을 위해 단 몇 마지기의 땅이라도 사는 게 청년 태진아의 첫 목표였다.
"고구마·감자라도 심어 먹게…. 3년이 지나 열 여덟살 되던 해, 모은 돈으로 땅 네 마지기를 사드렸다. 아직도 시골집 뒤편에 그대로 있다. 아버지가 아무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땅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팔지 않고 남겨두었다.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 그 땅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이 꿈만 같다. 매사에 감사하며 살게 된다."
태진아처럼 우여곡절 깊은 가수도 없다. 한 때 실수도 있었고, 억울한 누명을 쓴 적도 있다. 화가 날 만한 일이 적지 않았다. 풍파를 견디면서 내공이 쌓였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결코 사람을 미워하진 않는다고 했다.
"공 한쪽 얻어먹은 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반면 베푼 건 바로 잊는다. 감사한 마음이 크니 미워할 일이 없다. 내가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면 서운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내가 상대에게 해준 걸 잊어버리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
◇ 주름진 얼굴에 장돌뱅이의 미소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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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시간을 낸 적이 없다. 노래하며 떠돌다 보면 산천이 다 내집 같은데 무슨 꽃구경이 필요한가. 그렇게 다니다 보니 아내와는 꽃구경 한 번을 제대로 못했다. 그럼에도 평생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 아내가 고맙다. 언젠가 아내와 편히 여생을 보낸다면 여기(화개장터)로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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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심에 녹차밭이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 대규모로 들어선 녹차밭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 차 시배지가 지리산이다. 봄이면 하얗게 흐드러진 꽃길 옆, 돋아난 푸른 잎사귀가 싱그럽다.
◇ 태진아는 자신의 인생곡으로 '동반자'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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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생에 최고의 선물/ 당신과 만남이었어/ 잘 살고 못 사는 건 타고난 팔자지만/ 당신만을 사랑해요/ 영원한 동반자여'라는 짧은 노랫말이 그의 마음 전부란다. 그들 도움 없이 자신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장꾼들이 점심 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렇고 따뜻하다.' 시인 안도현은 장날을 이처럼 묘사했다. 신경림 선생은 시 '파장'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다. 태진아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태진아의 매니저 김정호 씨는 27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다. 현재 직급은 이사다. 스물 두 살에 태진아 매니저 일을 시작해 마흔 아홉살이 됐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될 위치지만 그는 여전히 태진아의 손발이 돼 움직인다.
"아껴주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친구가 나와 27년을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김 이사도 관둘 위기가 여러 번 있긴 했다. 교통사고가 한 번 있었다. 주위에서는 '한 번 사고 나면 또 나는 법이니 그 친구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무슨 죄가 있나. 나를 위해 피곤한 상태에서도 운전한 죄밖에 없다. 죄가 있다면 내 죄라고 생각했다."
태진아에 따르면 지난 2004년 서해안고속도로상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당시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고가 꽤 컸다. 차량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그대로 뒹굴었다. 빗길에 졸음운전이 원인이었다.
"차는 폐차했는데 다행히 몸은 성했다. 타박상 정도였다. 보통 2차 사고가 더 위험하다더라. 그때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 와중에 차량 한쪽 라이트가 한줄기 기적처럼 빛나고 있었다. 차가 주행 방향과 반대쪽으로 놓여지면서 라이트가 비추니 뒤에 오던 차량이 다 피해갈 수 있었다. 그날 사고 이후 남은 생은 덤이라 여기고 있다. 그 빛처럼 누군가의 삶을 환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 '김태강'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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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촬영 예정인 뮤직비디오에는 김용건 선배가 나온다. 강남과는 '전통시장' 일본어 버전을 발표할 계획이다. '김태강' 활동도 기회가 된다면 염두에 두고 있다. 팔도강산을 돌며 힘들었지만 많은 분이 좋아해주셔서 기운이 났다. 노래에 시장 이름 한 번 나왔다고 그렇게 기뻐해주실 줄 몰랐다. 이제 그만 둘 수가 없다. 시장이 살아야 서민이 살고, 서민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 가락(트로트)이 주는 향수와 정서가 있다. 장터도 마찬가지다. 서민과 가장 가깝고 친근한 우리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내 노래로 더 많은 분이 웃을 수 있길 바란다."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 건물이 치솟을 때 노점 상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바닥에 내려놓아진 물건을 두고 걸쭉한 입씨름이 오고 가는 흥정 대신 높은 진열대에서 힘겹게 꺼내어 담은 물건에는 딱딱한 바코드가 찍혀있다. 체계화된 시스템은 편리하지만 외로움을 부추긴다.(추억조차 사라져갈 풍경, 장날·안도현 글 일부 인용)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투박한 외침이 정겨운 장터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태진아의 '전통시장'이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 다 함께 전통시장 가요/ 여러분 다 함께 많이 팔아줘요.'(전통시장 노랫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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