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와 비지상파의 예능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했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유재석이다.
수많은 예능인과 PD, 작가가 종편 및 케이블 행을 선택했음에도 유재석은 굳건히 지상파 예능의 자리를 지켰다.
그랬던 그가 돌연 ‘탈(脫) 지상파’를 시도했다. 종합편성채널 출범 4년 만이다. KBS 2TV ‘해피투게더’로 인연을 맺은 윤현준 PD가 유재석을 종편으로 이끈 것.
유재석은 윤PD와 함께 오는 8월 방송 예정인 종합편성채널 신규 파일럿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나선다. 방송 3사의 스타 PD들이 대거 이동한데 이어 ‘국민MC’ 유재석까지. 그의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지상파에는 빨간 불이 켜졌다.
‘지상파 위기론’은 사실 한 두번 대두된 것이 아니다. 케이블채널 tvN과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한 이래 수많은 제작진들이 갈아타기를 시도하면서 위기론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러면서도 출범 당시에는 “얼마나 잘 되겠냐” “그래봤자 아류 아닌가” 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지상파의 압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그러나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시리즈가 초히트를 치고, tvN 드라마 ‘응답하라1997’가 전국적 신드롬을 몰고 오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지상파는 거의 포맷 복제 수준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복고 콘셉트들을 연달아 내놓기 시작했고, 거의 대부분이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폐지되는 쓴 맛을 봤다. 대놓고 베끼는 형국에 오히려 시청자들의 비난까지 불러일으켰다.
지상파가 급급히 케이블의 프로그램들을 따라하는 동안 종편에서도 잇단 승부수를 내놓았다. ‘비정상회담’ ‘마녀사냥’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예능 프로그램과 ‘밀회’ 등의 드라마로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 양질의 콘텐츠로 입지를 탄탄히 다져놨다. 케이블도 멈추지 않고 ‘응답하라1994’ ‘미생’ ‘삼시세끼’ 등으로 연달아 카운터펀치를 날리며 지상파의 입지를 점점 좁혀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고 인기가 검증된 것만 따라하려던 지상파의 안일한 대처가 비지상파의 공세에 완전히 밀려났고, 결국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게 됐다.
요즘 예능과 드라마를 보는 시청층들은 지난 세대들 보다 훨씬 예리하고 민감한 눈을 갖고 있다. 흥미를 끌만한 콘셉트에 인기 출연진만 갖췄다고 해서 만사가 아니다. “이런 내용은 좀 식상하다”부터 “이 프로그램은 저 프로그램 그대로 따라했네” “진행이 너무 루즈해서 보는 재미가 없다” 등 신선함과 재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냉철한 평가를 내린다. 어설프게 흉내내거나 뻔한 소재를 끌어왔다가는 이미지만 악화될 뿐 본전도 못 찾게 된다.
유재석이 종편행을 결심한 이유는 그가 이런 형국을 읽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케이블과 종편 프로그램이 방송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진행된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절반 이상의 상을 비지상파가 휩쓸어 갔다. ‘미생’이 3관왕을 석권하고, ‘삼시세끼’ 나영석 PD가 당당히 대상을 받아도 반기를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지상파의 활약상과 지상파의 침체를 고려했을 때 유재석의 종편행은 자연스런 흐름이자 당연한 선택이다. 또, 비지상파가 지상파와 견줄 만한 위치로 올라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미 신동엽 김구라 전현무 등 인기 예능인들이 비지상파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명한 나영석 윤현민 PD 등 새 둥지를 튼 제작진들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창의성을 뽐내며 새로운 트렌드를 생성해가고 있다. 여기에 국민MC 유재석의 파워까지 더해진다면 아무리 지상파라도 이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더욱 무서운 점은 유재석의 종편행으로 인해 강호동을 비롯한 다른 예능인들의 비지상파 진출에도
강호동도 종편 진출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예능계의 상징성을 지닌 유재석의 행보가 분명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스타 PD부터 거물급 예능인까지 빼앗기게 된 지상파.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행보가 주목되는 바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