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이다원 기자] “쪽대본 때문에 작가 목을 조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데 참았다. 공개적으로 ‘만나면 후려갈기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배우 박근형이 과거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이다. SBS ‘추적자, 더 체이서’ 대본이 늦게 나와 엄청 화가 났지만, 박경수 작가의 필력이 굉장히 좋아 자연스레 풀렸다는 내용의 발언이었다. 작가의 실력을 칭찬한 일화였지만 50년 넘는 연기 경력을 지닌 노배우를 화나게 했다는 ‘쪽대본 사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었다.
쪽대본이란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 혹은 시간에 쫓겨 하루 촬영분에 대한 대본을 당일 받는 것을 이른다. 충분한 준비 없이 제작이 이뤄지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를 흐리는 것은 물론 방송 사고, 조기 종영으로까지 이어져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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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MBN스타 DB |
최근 종영한 SBS ‘펀치’에서도 쪽대본 부작용이 발견됐다. 수준급 영상미와 흥미로운 극 전개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작품이지만 지난 2월 마지막회 방송에서 불안정한 음향과 영상이 멈추는 사고로 오점을 남긴 것. 극 중 신하경(김아중 분)과 박예린(김지영 분)이 차를 타고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서 ‘뚝’하고 멈춰버린 뒤 사과 자막으로 대체해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다.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고도 쪽대본에서 빚어졌다. 수정 대본이 늦게 전달된 탓에 방송 당일 촬영, 편집, 종편(자막, BGM 등을 삽입하는 일) 등을 정신없이 끝내 일어난 실수라는 설명이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종방연에 모여 마지막회를 보던 관행도 이 사건 때문에 바뀌었다고. 요즘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마지막 방송이 무사히 나간 다음 날 종방연을 치르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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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BS 방송 캡처 |
이런 쪽대본의 피해는 현장에서 주야장창 뛰고 있는 스태프들은 물론 생방송처럼 대사를 외우고 연기해야하는 배우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한 배우 소속사 관계자는 “쪽대본 때문에 스탠바이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월화수목금금금’ 일정이다. 5일 동안 총합 다섯 시간도 못 자고 연기하니 죽을 맛 아니냐”며 “쪽대본이 나와도 배우들이 다 소화해내서 이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건지 의문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캐릭터 분석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대사를 외우자마자 찍어야 하니 거의 기계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PD도 쪽대본 때문에 겪는 괴로움을 내비쳤다. 그는 “연출자로서 쪽대본 때문에 스태프들에게 늘 미안했다. 이틀 뒤 촬영인데 대본이 늦게 도착하면 촬영 장소도 다시 구해야 하고 소품도 준비해야한다. 그 수고는 모두 스태프들의 몫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여기에 대본까지 어설프면 연출까지도 혼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원래 대본과 달리 머리를 쥐어짜내 급하게 만든 대본이 완성도가 얼마나 높겠느냐. 대본이 허술한데 연출이 잘 나오길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쪽대본으로 작품이 애초 시놉시스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배우 분량이 뒤바뀌어 주연의 존재감이 조연보다도 떨어지는 우스운 상황도 연출됐다. 작품을 쓸 때 분당 시청률이 잘 나오는 배우 위주로 얘기가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아이돌, 청춘 스타 등 화려한 출연진으로 큰 기대를 받았으나 ‘역대급 망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속 배우 A는 종영 후 인터뷰에서 “작품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 몰랐다. 갑자기 튀어나온 전개에 캐릭터도 엉망으로 변했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이처럼 쪽대본으로 드라마 현장이 멍들어가고 있지만 개선의 움직임은 수년 째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가들의 게으름을 탓하는 불만만 잔뜩 쌓여갈 뿐이었다. 배우들이 직접 공식 석상에서 작가에 대한 일침을 가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쪽대본 사태는 작가들의 태도 개선만 이뤄져야만 해결이 가능할 것일까. <‘쪽대본’②으로 이어집니다>
이다원 기자 edaone@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