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이다원 기자] 배우 임예진이 ‘국민여동생’으로 청춘스타 반열에 오른지 딱 40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십 명의 여자 스타들이 ‘국민여동생’이란 타이틀 아래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재밌는 건 ‘국민여동생’이란 타이틀도 시대에 따라 트렌드가 있다는 점이다. 40년의 변천사를 살펴보며, 대한민국에서 사랑받은 ‘국민여동생’의 조건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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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이주영 |
◇ 1970년대-임예진 강주희
‘국민여동생’의 원조는 누가 뭐래도 임예진이다. 1976년 영화 ‘진짜진짜 잊지마’에서 이덕화와 함께 나온 뒤 전국 남학생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며 하이틴 스타로 초고속 성장했다.
뽀얀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까지 최근 유행하던 ‘포켓걸’이 당시 임예진에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당시 임예진은 이상적인 여고생의 전형으로 떠올랐고, 고등학생의 나이에도 8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엄청난 흥행 파워를 보였다.
또 다른 ‘국민여동생’으론 배우 강주희를 꼽을 수 있다. 달걀형 얼굴과 쌍꺼풀 짙은 눈, 세련되고 귀여운 외모로 임예진과 다른 깜찍함으로 승부한 그는 1977년 영화 ‘고교얄개’가 히트치면서 고교생 청춘 영화의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후 그는 ‘남궁동자’ ‘내 이름은 마야’ ‘고교우량아’ ‘대학얄개’ ‘해뜨는 집’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다. 이후 어린 티를 벗고자 성인영화에 출연하며 신고식을 치렀지만 ‘국민여동생’ 이미지는 그에게 족쇄가 되고 말았다.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에서 파격 베드신까지 벌였지만, 하락세를 걷다가 결국 22살에 연예계를 은퇴했다.
◇ 1980년대-이상아 이미연 하희라
1980년대엔 좀 더 서구적인 외모의 미인들이 ‘국민여동생’ 수식어를 얻었다. 이미연, 하희라, 이상아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상아는 일명 ‘책받침 여신’으로도 유명했던 스타다. 1984년 KBS 드라마 ‘TV 문학관-산사에 서다’로 데뷔한 그는 이듬해 영화 ‘길소뜸’에서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전라 노출 연기를 펼쳐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의 미모는 tvN ‘응답하라 1988’에서도 언급됐을 정도.
이후 그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방황하는 별들’ 등 다수 영화와 ‘사랑이 꽃피는 나무’ 등 청춘 드라마에 나오며 ‘국민여동생’으로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이상아가 ‘깜찍함’의 대명사였다면 이미연은 ‘청순미’를 무기로 남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국민여동생’이다. 그는 1989년작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한 뒤 18살 나이로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상까지 차지했다. 당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그는 특유의 하늘하늘한 매력으로 초콜릿 CF 등을 히트시켰고, 몸값은 하늘 위로 치솟았다.
하희라는 큰 눈과 동그란 얼굴, 생글거리는 미소가 주무기인 스타였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 합창단에 발탁돼 방송활동을 시작했고,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로 하이틴 스타로 주가가 치솟았다. 이후 그는 영화 ‘캠퍼스 연애특강’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 1990년대-송혜교 유진 성유리
1990년대엔 하이틴 패션 잡지 스타와 1세대 아이돌이 연예계를 휘어잡으며 ‘국민여동생’ 타이틀도 이들에게 넘어갔다. 최창민과 함께 큰 인기를 누렸던 송혜교, S.E.S 유진과 핑클 성유리 등은 당대를 주름잡던 ‘여신’들이었다.
송혜교는 1996년 선경스마트 모델선발대회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는 오밀조밀한 깜찍한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교복 모델이었지만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최창민과 더불어 하이틴스타 투톱으로 인정받으며 각종 예능부터 시트콤까지 두루 섭렵했다.
가요계에서도 ‘국민여동생’이 등장했다. 걸그룹 S.E.S와 핑클이 라이벌로 맞붙으면서 각 팀의 얼굴이었던 유진과 성유리가 연령 상관없이 남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아냈다.
유진의 등장은 가요계의 충격이었다. 올리비아 핫세를 연상케한 외모와 청순미, 여성스러우면서고 귀엽고 깜찍한 면모까지 갖춘 그가 요정처럼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 그야말로 ‘비주얼 쇼크’였다. 사진, 브로마이드는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아이돌 구즈들은 엄청난 가격에 팔려나가기도 했다.
유진의 대항마는 성유리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큰 눈망울에 청초한 이미지, 말을 잘 하지 않는 신비주의까지 더해 남자들에겐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그는 유진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팀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 2000년대-문근영 보아 장나라
1990년대 ‘국민여동생’이 요정 이미지가 강했다면 2000년대엔 다시 귀엽고 친근한 ‘현실 여동생’ 이미지로 돌아온다. 문근영, 보아, 장나라 등이 소녀 이미지를 앞세워 남성 팬들을 공략했다.
그 중 문근영이 가장 선봉장에 섰다. 2000년 KBS2 ‘가을동화’에서 송혜교 아역으로 출연한 그는 가녀린 몸과 큰 눈망울, 앳된 외모를 앞세워 ‘국민 여동생’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영화 ‘어린 신부’가 흥행하면서 그의 인기엔 불이 붙었다. 삼촌, 오빠 할 것 없이 ‘보호대상 1위’로 그를 꼽았고, 각종 순수한 이미지의 CF 제안은 문근영에게 일순위로 들어갔다.
장나라는 문근영보다 나이는 있었지만 혀짧은 화법과 동그란 눈, 흰 피부 덕분에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는 만 20세 나이로 2001년 1집 앨범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를 히트시키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MBC ‘뉴 논스톱’에서 상큼한 이미지를 어필해 시청자 눈도장을 받았고,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또 한 번 청춘스타 도약의 발판을 다졌다. 여기에 ‘스위트 드림’이란 히트곡이 ‘장나라’란 이름 석자를 단숨에 남성 팬들의 마음에 아로새겼다.
보아는 당시 최연소 데뷔 아이돌이란 타이틀로 주목받던 가수였다. 그는 2000년 14살의 나이에 1집 앨접 ‘ID: Peace B’로 데뷔해 앨범마다 큰 화제를 몰고왔다. 특히 2002년 발매한 ‘넘버 원’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누구나 따라부르는 ‘국민 가요’로 떠올랐다. 보아는 아담한 키에 파워풀한 댄스와 훌륭한 노래 실력, 꿈을 위해 어린 나이에도 데뷔를 감행한 강단 등 다양한 매력으로 ‘국민여동생’ 반열에 올랐다.
◇ 2010년대-김연아 아이유 수지
2010년 이후 굉장히 많은 여자 스타들이 ‘국민여동생’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특히 걸그룹 멤버들은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이 수식어로 홍보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수지와 아이유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걸그룹 미쓰에이 멤버인 수지는 데뷔 때부터 청순한 외모로 큰 인기를 얻었고, 출연작 ‘건축학개론’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국민여동생’으로 자리잡았다.
아이유는 2008년 ‘미아’로 데뷔했을 때만 해도 ‘국민여동생’으로 떠오를 거란 예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마쉬멜로우’란 깜찍한 댄스곡을 내놓더니 ‘좋은 날’로 인기 정점을 찍으며 수지에 대적할 만한 하이틴스타로 성장했다.
특히 아이유는 섹시 콘셉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서 순수한 이미지를 고수하며 삼촌 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내숭 없고 팬들과 소통하는 소탈한 면모도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피겨 퀸’ 김연아는 연예인이 아니지만 ‘국민여동생’ 타이틀로 큰 인기를 얻은 케이스다. 그는 빙판 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를 펼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를 동시에 가져가면서 전국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또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순수한 소녀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많은 스타의 이상형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다원 기자 edaone@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