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故이주일,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숨 쉬는 ‘코미디언의 전설’이었다.
이주일은 우리나라의 넘버원 코미디언이었고, 코미디 역사에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4년째. 하지만 아직도 많은 코미디언들과 방송계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1980년대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던 그의 별명은 ‘코미디언의 황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주일의 코미디를 다시 짚어보자.
![]() |
◇ 이주일, 2주일 만에 떠서 ‘이주일’
이주일은 1960년대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 격인 문선대에 뽑히면서 처음 코미디 무대를 시작했다. 그는 제대 후 1965년부터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 진출하고, 각종 위문공연을 다녔지만 근 10년 정도의 무명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방송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바로 가수 하춘화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주일은 하춘화의 지방 공연 사회자로 발탁돼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77년 하춘화가 공연을 준비하던 극장의 천장이 붕괴되는 사고가 났다. 당시 이주일은 후두부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하춘화를 업고 그를 구해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던 하춘화는 이 일로 이주일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공연을 다닐 때 마다 ‘사회자가 이주일이 아니면 안 된다’며 그를 적극적으로 공연계로 이끌었다.
하춘화 공연의 전속 사회자로 이름을 알린 이주일은 이를 계기로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 발탁돼 1979년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과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TV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가 이주일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나온다. 이주일은 1980년 1월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서 타잔 역의 가수 윤수일 뒤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서 있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한 나머지 조연출의 ‘큐’ 사인을 잘못 받아들이고 뛰어나오다 줄을 타고 연못 위를 지나가던 윤수일과 부딪혔고, 연못에 빠졌다가 멍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생방송 중 일어난 일이라 ‘대형사고’급 NG였으나, 시청자들은 이를 계획된 것으로 알고 크게 폭소했고, 그 반응에 힘입어 그 다음 주에도 이주일은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 출연을 한다. 그 때에도 그는 “운명하셨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하는 역할이었으나, 실수를 ‘웃기게’ 하는 바람에 ‘진짜 웃기는’ 코미디언이 됐다.
![]() |
2주 만에 사람들이 방송사로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정도로 유명세를 탄 덕분에, 그 때까지 정주일이라는 본명을 사용하던 이주일은 ‘2주일 만에 떴다’는 의미로 이주일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됐다. 훗날 이주일은 몇몇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그 2주에 대해 “난 ‘큐’ 사인을 처음 받아봐서 몰랐다. 얼마나 내 모습이 우스웠겠나. 제가 스타가 된 건 순전히 실수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 승승장구하던 그가 정계에 진출하고 남긴 한 마디
이를 계기로 이주일은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서 다양한 코너를 맡게 됐고, 이후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의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못생겨서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1주 만에 퇴출됐던 과거를 넘어, 그는 ‘못생긴 외모’로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는 이후 이상해와 콤비를 결성, 수지 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오리춤’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하지만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저질’이라는 딱지가 붙어 방송에서 퇴출당했다. 그럼에도 이주일은 ‘밤무대의 황제’로 불리며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자랑했다. 그는 1986년 다시 방송에 복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으로, 199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의원에 선출되며 잠깐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일은 1996년 “여기에는 나보다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간다”는 명언을 남기며 정치계를 떠났다.
SBS 토크쇼 ‘이주일 투나잇 쇼’를 통해 연예계로 복귀한 이주일은 더욱 강력해진 풍자로 시청자들을 웃겼다. 하지만 워낙 강렬해진 풍자 때문에 수차례 방송심의위원회에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코미디를 위해 모든 걸 다 했던 그는 ‘이주일 투나잇 쇼’ 100회 특집을 끝으로 방송계를 은퇴했다.
특히 이주일의 활동 일화로 유명한 것은 그의 외아들이 사망했을 때 3일 만에 무대에 오른 일이다. 미국에 유학 갔던 외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이주일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온지 3일 만에 무대에 올랐다. 이주일은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씨와 박철언 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한 마디로 시청자들을 웃겨 후배 코미디언들의 귀감이 됐다.
![]() |
◇ 후배들의 ‘큰 별’이 된 이주일, 그는 전설이 됐다
은퇴 후 이주일은 2001년 폐암을 선고 받고 투병생활을 했고, 2002년 1월 금연캠페인에 앞장서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축구광이었던 이주일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룬 후 2002년 8월 27일 결국 별세했다.
후배들은 이주일의 족적에 큰 영감을 받아 각종 코너들을 내놨고, 실제로 최병서, 엄용수, 김학래 등 이주일과 함께 코미디 무대에 섰던 후배들은 아직도 이주일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김학래는 이주일이 아들을 잃은지 3일 만에 무대에 오른 것에 대해 “무슨 일이든 꼭 약속을 지키고야 마는 사람”이라며 “이주일은 가슴 따뜻한 선배이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다. 그를 기억하면 웃음과 눈물이 함께 나온다”고 회상한 바 있다. 엄용수 또한 “이주일은 황제란 칭호를 받고 최초로 국회의원까지 했지만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고 아픔도 많이 겪었던 분이다”며 “이주일의 삶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이주일을 회상했다.
요즘의 코미디언들 또한 이주일을 롤모델 삼아 활동 중이다. 코미디언 손헌수는 “이주일, 김병조 선배님 등을 보며 MBC 개그맨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고백하기도 했고, 이봉원은 “이주일 선배님은 한국 코미디의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입담이면 입담, 코믹연기면 연기로 장시간 웃길 수 있는 코미디언이었다”고 그를 존경하는 이유를 밝힌 적도 있다.
이처럼 존경을 한몸에 받은 이주일은 이제 ‘전설’로 남았다. 자신을 낮추고 관객을 높였던 이주일은 코미디언이 ‘스타’를 넘어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됐던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오리춤’을 추며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그의 얼굴을 아직도 많은 시청자가 그리워하고 있다.
이주일은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0년 문선대에서 코미디를 시작하여, 1965년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 데뷔를 했다. 2002년 8월 27일 오후 3시 15분 경 국립암센터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웃으면 복이와요’ ‘청춘만만세’ ‘이주일 투나잇 쇼’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코미디의 새 역사를 썼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