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서이숙은 “연기자, 그 단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배우’라는 단어를 두고 ‘연기자’라고 표현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단다. 단어 하나에 의문을 가질 만큼, 배우에 대한 서이숙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서이숙은 올해 유난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50부작이었던 ‘육룡이 나르샤’와 ‘가화만사성’을 연달아 찍고, 그 사이 ‘마스터-국수의 신’도 찍었다. 지금은 브라운관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배우지만, 사실 그가 TV에 나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다. 1989년에 연극 무대로 데뷔한 그에게는 참 늦은 ‘TV 데뷔’였다.
“손현주 같은 연극 동기들이 참 많이 TV나 영화로 갔다. 그걸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아직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스스로를 항상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매체’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력을 쌓자’는 생각에 ‘이름을 알리자’란 생각은 할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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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점프엔터테인먼트 |
그는 “연극이 좋아서” 무작정 연극을 시작했다. 극단 미추 소속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를 한 후 한동안 작은 역할들을 했고, 그러다 ‘허삼관매혈기’의 허옥란 역으로 2004년 동아연극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던 서이숙은 스스로에 “무식했지”라며 웃음을 지었다. 우직했고, 무뎠다며 그는 “20년을 연극하면서 ‘아직 성과를 못 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각종 상을 받으며 조금씩 ‘피는 꽃’일까 싶었는데, 그 때 찾아온 병마로 한동안 서이숙은 쉬어야만 했다.
“이제 막 ‘움직일까’ 싶었는데 2011년 덜컥 갑상선암에 걸렸다. 한창 꽃필 때 가라앉은 거다. 인생 참 많이 배웠다. ‘내가 뭘 잘못했어’ 싶기도 하고. ‘왜 잘나갈 때 발목을 잡는 거야’ 원망도 들었다. 그럴 때 마침 제게 드라마 ‘제중원’ 출연 제안이 왔다. 캐릭터는 작지만 목소리를 많이 안 써도 되는 역할라고 하더라. 제 몸 상태에 맞으니 하게 된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TV로 처음 넘어가게 됐다. 또 다시 느꼈다. 인생은 그런 거라고.”
하지만 그 작은 계기로, 서이숙은 TV에 완전히 발을 붙이게 됐다. ‘목소리’로 사람들은 서이숙을 기억했고, 점점 더 많은 드라마에서 그를 찾게 됐다. 그는 “솔직히 처음엔 대극장에서 주인공 하던 내가 작은 역할들을 하니 영 어색했다”고 말하면서도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좋게 봐줘서 다행이었다”며 웃었다. 그런 그에 물었다. 왜 진작 TV나 영화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말이다.
“배우는 선택을 받는 직업이다. 그러다보니 제가 서류를 내서 오디션을 볼 생각을 못했다. 제가 잘해서 두각을 보이면 자연스레 날 찾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과를 못낸 것’이라 생각했던 거고. ‘부럽다’고 생각한 건 다행이지 않나 싶다. 잘 몰랐던 것도 있고 원래도 내게 별 도움이 안 된다 생각하면 귀를 막고 안 듣는 스타일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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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MBN스타 DB(연극 무대 위 서이숙-가운데) |
“내 것만 가자”는 소신 때문에 다행히 다른 사람들의 행보를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에 맞는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고 회상하던 서이숙은 ‘내공’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생각하는 ‘내공’은 어디서 올까. 서이숙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대번에 “난 시간의 공력을 믿는 편이다”라고 대답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시간이 채워지지 않은면 바닥난다고 생각한다고.
“오랜 세월 한 길을 판 것도 시간의 공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공력이 채워지면 난 든든하다. 시간을 채워서 견뎌왔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된다. 연기할 때에도 그렇다. 길이 안 보이면 대본을 들여다본다. 대본을 본 그 시간 동안 무언가 얻는 게 생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성과는 반드시 나게 되어 있다. 시간의 깊이는 분명 존재한다.”
서이숙이 20년 이상을 연극에서 버텨온 이유는 바로 ‘시간의 공력’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기에 시간을 들인 서이숙은 마침내 시청자들에 익숙한 배우가 됐다. 그런 서이숙에 후배들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혹시 있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연기자라는 단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불쑥 물었다.
“난 연기자라는 단어가 싫더라.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이배우님’ ‘지배우’ 이런 식으로 불렀다. 물론 ‘배우님’이란 단어가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부르면 그들도 ‘배우’라는 것에 더 익숙해진다. 실제로 후배들이 나중엔 편안해하고. 배우들이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잘 알았으면 좋겠는 거다. 하지만 그 ‘배우’라는 호칭을 가지려면 그에 맞는 사고도 필요한 건 분명하다. 젊은 친구들이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인생사를 논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배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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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문화사색 방송 캡처 |
서이숙은 “인생사를 말하는 게 배우인데, 사회 문제를 모르면 배우를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순재나 김혜자처럼 ‘대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 이유는 ‘삶의 내공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그와 동시에 서이숙은 후배들에 ‘독서’를 추천했다.
“젊었을 적의 연기는 어쩔 수없이 다 흉내다. 하지만 그걸 채워나가며 배우로서의 품위, 격조와 연기의 깊이를 쌓으려면 삶에 대해 열려있어야 한다. 사회의 구석구석을, 아픈 사람들을 바라봐야 한다. 화려한 것만 바라보면 분명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또한 연극을 하며 고전작품을 만나고, 그에 따라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 ‘탐독’의 시간이 내공으로 가더라. 실제 삶에서 공부하고, 책으로 공부했다. 그러면 점점 두려운 게 사라지는 것 같다.”
그는 “연극에 숙달되어 있는 내게 드라마는 아직도 낯설다”며 “가끔은 내 연기를 보면 짜증날 때가 있기도 하다”며 웃었다. 서이숙은 그러면서 “배우는 참 어려운 직업”이라고 말했다. 끝이 없고, 죽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하는 게 배우이기 때문이다. 서이숙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연기의 소중함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순재 선생님은 아직도 정말 열심히 하신다. 그만큼 연기가 소중하셔서 그런 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중함이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내가 나중에 후회를 더 안 했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더 빨리, 많은 것을 알고 싶은데 세상은 공짜가 없다고, 딱 내가 노력한 만큼만 주더라.(웃음) 아직 나도 그 ‘노력하는 과정’ 중 하나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김혜자 선생님을 보면, 선생님만의 독특한 호흡법이 있다. 그런 호흡법 하나만 남겨도, 그게 바로 배우로서 성공한 거 아닐까 한다.”
서이숙은 시간을 믿었고, 그 시간 안에 쌓이는 내공을 믿었다. “묘비명이 새겨질 때까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