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하는 건 노력이고, 내가 하는 건 미련한 건가요?"(엄지 발가락 부상을 속인 걸 알아챈 선배 수지가 "왜 이리 미련하냐? 얼른 병원 치료 받자"고 하자 만복이가 내뱉는 말)
"공무원 되는 것도 힘들어요. 제 꿈요? 전 칼퇴하고 집에서 맥주 한잔 '때리고' 싶어요. 적당히 살고 싶어요."(진학 상담을 하는 담임에게 만복의 짝꿍 지현이 하는 말)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의 두 대사가 묘한 울림을 준다. 전혀 다른 내용과 상황의 대사 같은데 달리 볼 수만도 없다. "빨리" "열심히" "뭐든 잘하라"는 극단적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건드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선천적 멀미증후군 여고생 만복(심은경). 만복은 2시간 거리의 학교까지 걸어 다니다 담임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다"며 강제로 육상부에 인계(?)된다. 딱히 하고 싶지는 않으나 "공부는 하기 싫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운동은 쉬울 것 같아서 열심히 하는 척" 한다.
하지만 만복은 처음으로 자기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은 신념으로까지 확대된다. 하지만 그놈의 멀미가 문제다. 차만 타면 오장육부를 드러낼 것 같은 토악질에 정신이 혼미하다. 운동을 포기하게까지 만든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뒤흔든 경보가 그리 쉽게 포기 될까?
다시 찾은 육상부. "나도 선배처럼 되고 싶다. 열심히 잘할 수 있다"는 만복의 그 믿음조차 무시당해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늦게나마 재능을 발견하고 좋아하게 된 걸 포기해야 하는 건가? 또 공무원이 되고 싶은 꿈은 무시당해야 할만큼 하찮은 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늦게 발견하는 이들도 은근 많다. 늦은 사춘기를 겪는 청년도 다수다. 심지어 어른도 마찬가지다.
'걷기왕'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10대와 20대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전하는 영화다. 영화는 무언가 대단한 걸 하라고 부추기진 않는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이라는 걸 일 깨운다. 느리게 가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으면 그 뿐이다.
후반부 '나는 왜 그리 빨리 달렸을까?'라고 되뇌는 만복의 표정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표정이다. 10대 아역 배우에서 20대 배우로 넘어가며 삶과 꿈에 대해 고민했던 배우이자 인간 심은경은 이 영화를 통해 힐링했다는데, 그 표정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 드러난다.
대단한 장면과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면이 많은 건 아니지만 착한 영화의 역할을 다한다. 너무 뻔한 내용도 아니다. 재기발랄한 연출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웃기려고 작정한 상황이 빗나간 부분도 있을 것 같고 중간중간 늘어지는 전개도 있지만 관객을 미소 짓게 하고 따뜻한 마음이 들게
"노력은 끝이 없다." "최선을 다해도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는 몰라. 그런데 넌 장난으로 하잖아." "다들 뭔가가 될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등등. 주옥같은 명대사들은 가슴 속을 파고든다. 93분. 12세 이상 관람가. 20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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