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스토리`로 강한 울림을 선사할 배우 김해숙. 사진 | 강영국 기자 |
“뭔가 해냈다? 인생작? 글쎄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가 정말 진심으로 열심히 하긴 했는데…촬영 내내 스스로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요? 살아계신, 혹은 이미 돌아가신 그 분들께 혹시나 누가 되면 어쩌나, 그런 걱정뿐이에요. 연기 인생 44년간 가장 어렵고 가슴 아픈,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이같이 말하는 배우 김해숙(63)의 눈가는 촉촉했다.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에서 그는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도 아쉬움이, 알 수 없는 미안함이 많이 남는 듯했다. 작품에 대한 애착이 워낙 컸던 것인지, 자신이 연기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한 깊은 진심에서인지, 혹은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왠지 묻지도 못했다. 확실하게 느낀 건, 어떤 의미로든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것.
“촬영 내내 한 번도 모니터를 못 봤다. 내 연기를 볼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는 그는 “매 작품 최선을 다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 이상으로 뛰어 들었음에도 (배우로서) 너무나 힘든 감정이었다. 내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을 참는 게 곤혹이었고 매순간 ’이것밖에 안 되나’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5, 6개월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이미 작품을 통해 그가 얼마나 진심과 열정을 다했는지 확인했기에 덩덜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 위안부 피해자 연기를 하며 우울증까지 앓았다는 김해숙. 사진 | 강영국 기자 |
김해숙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깜짝 놀랐다. 빨리 벗어나려고 다른 캐릭터를, 작품을 찾았지만 그 당시만 반짝하고 끝나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더라.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이라고 하더라. 치열하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야 좀 괜찮아 지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무려 6년간 10명의 원고와 13명의 변호인이 일본 시모노세키(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를 상대로 23번의 재판을 진행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허스토리’는 일본군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유의미한 관부(하관-부산) 재판 사건을 스크린에 옮겼다.
작품마다 깊이 있는 내공으로 감동을 준 김해숙은 ’허스토리’에서 고통과 분노에 얼룩진 위안부 피해자의 감정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해낸다. 덤덤하지만 묵직하고, 따뜻하면서도 애처로운 정서로 강한 울림을 선사한다.
그는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너무 놀랐다. 내가 이런 역할을 맡을 날이 올 거라고 전혀 상상치 못했는데 해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감이 들어 덜컥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분들의 감정을 대리로라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같은 여자로서 어떤 아픔인지 감히 알 것도 같지만 사실 알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나리오를 읽던 중 관부 재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가 너무 대충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분들의 상처가 너무나 커 나도 피하고 있지 않았나 싶더라.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이 재판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자 나 자신을 내려놓기 위해 (스스로와)치열하게 싸웠다”고 했다.
“여전히 살아계신 분들도 계신데, 배우랍시고 그분들을 대신 보여준다는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이게 맞게 하는 건지 확신도 안 들고 점점 더 고민이 쌓여갔죠.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 같아요. 서로가 말 없이 손을 잡아주거나 힘든 촬영이 끝나면 ’괜찮냐’라며 다독여주고요. 영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면서도 차마 볼 용기가, 마주할 자신도 없고,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모든 점에서)어려웠어요. 영화에 대한, 연기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나 할까요?”
위안부 소재 영화는 그동안 충무로에서 꾸준히 제작돼 왔다. 지난해 9월에는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색다른 시각으로 그려낸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가 김현석 감독)가 개봉해 큰 사랑을 받았고, 이 영화로 주연 배우인 나문희는 그 해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노배우의 빛나는 존재감을 증명한 바 있다.
평소 나문희와도 친분이 깊은 김해숙은 “나문희 선생님을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굉장히 존경한다. ‘아이 캔 스피크’가 정말 보고 싶었고, 선생님이 어떻게 연기하시는지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흔들릴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보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극 중 배역인)배정길, 이 분에게만 집중하고 싶었어요. 제 자신을 내려놔야 했죠. ’연기를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배우로서의 욕심이랄까요? 오히려 그런 게 제게 독이 될 것만 같았어요. 집에서 ’아이 캔 스피크’ IPTV 보기를 눌렀다가 취소했다가 그러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웃음)”
치열하게 모든 작업을 끝내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할 시점에 이른 지금. 최근 언론시사회 이후 평단에는 그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김해숙은 “다들 ’허스토리’에 도전한 내게 의미있는 작품을 해냈다고 하지만 정작 난 의미있다는 생각, 뿌듯하고 해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이 영화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고, 할머니분들께 누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 김해숙은 `허스토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진 | 강영국 기자 |
끝으로 그는 “김희애씨가 연기했던 그 분(문정숙)은 아직 살아계신다. 그분들이 바라던 걸 직접 보지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허스토리’는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김선영, 김준한, 이유영, 이지하 등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열연했다.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민규동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는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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