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플란트는 빠진 치아를 대체하는 치과 치료법이다. 상실된 치아 자리에 티타늄으로 제작한 나사를 뿌리삼아 인공치아를 심는 원리다. 임플란트 시술은 자연치아와 심미적, 기능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수명이 길다는 장점도 있다.
임플란트 시술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닐 만큼 대중화된 치과 치료법으로 자리 잡은 상태다. 한국소비자원 통계에 따르면 시술되는 국내 임플란트 시술 건수는 연평균 약 50만 건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65세 이상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 정책으로 시술 건수가 더욱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임플란트의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치아가 상실되면 조개 껍질, 상아 등을 넣어 이 대신 사용하려 했다고 기록돼 있다. 기원전 600년 때 고대 마야인들도 조개 껍질로 가짜 이를 만들어 넣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근‧현대에 들어와 지난 1951년 스웨덴 룬트 대학의 정형외과 전문의 브로네막(Branemark) 교수가 연구 중 우연히 티타늄이 생체 뼈에 고정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로네막 교수는 이 현상을 '골유착현상'으로 명명했다. 이는 임플란트 시술의 현대화 계기로 작용했다.
1965년에는 현재 형태에 가까운 임플란트로 첫 시술에 성공하는 사례가 등장했다. 이후 1981년에 임상자료가 학계 내 보고된 바 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부터 임플란트 시술이 시작됐다. 국내 임플란트 시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대표적인 의료인으로는 일본 동경치과대학 보철학 석사, 일본 국립 히로시마대학 구강외과학 박사 출신이자 일본 임플란트 인정의 214호인 김재철 라치과 원장을 꼽을 수 있다. 김 원장은 1980년대 당시 치과계가 임플란트 시술을 두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전한다. 티타늄에 무지한 상태에서 이를 재료 삼아 턱뼈 골융합을 기조로 하는 임플란트 시술을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낯선 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치과계에서는 임플란트 시술 시 티타늄을 턱뼈에 유착시켜야 하기 때문에 염증 등 부작용 우려가 존재할 것으로 여겼다. 명확한 임상이나 논문 발표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그 당시 김재철 원장이 한 일은 먼저 '한국치과임플란트연구회'를 만들어 임플란트 시술 편견을 걷어내고자 강연을 펼친 것이다. 김 원장은 동경 치과대학 유학 시절 발표한 임플란트 연구 논문 '임플란트 케이스 리포트'를 가지고 국내에 알리는데 주력했다.
김 원장은 "그렇게 위험한 치료법을 함부로 소개해도 되느냐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그만큼 임플란트 시술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에 따라 브레네막 센터 자료를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또 꾸준히 임플란트 시술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국내 치과 의사들의 인식을 바꾸고자 했다. 경남 진해에 치과를 개원해 직접 임플란트 시술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외산에 의존해야 했던 임플란트 재료가 국산화되기 시작했다. 국내 임플란트 기업들이 동양인 골격에 맞는 임플란트 재료를 연구개발하기 시작하면서 국산화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도 김 원장은 당시 사용했던 판상 임플란트 대신 치아 뿌리 모양의 루트 폼 임플란트를 처음으로 국내에 가지고 들어와 시술에 활용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 |
이후 전국적으로 강연을 펼치며 임플란트 알리기에 주력했다. 서울, 전주, 경남, 경주 등에서 100시간 동안 1년 코스로 강의를 진행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병원의 해외 진출 개념이 생소하던 시기, 김 원장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진출해 임플란트 시술을 전개했다.
김 원장은 “그때 카자흐스탄 환자들은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독일 등으로 원정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현지 치과 개원에 더욱 욕심이 났다.”며 “개원 후 진료를 했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중도 귀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카자흐스탄 치과는 영리 목적이 아닌 봉사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임플란트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
원진재 매경헬스 기자 [ wjj12@mkhealth.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