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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임기간 내내 장기간 군사 정부가 집권하면서 발생한 부정부패를 종식시키고 새 역사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대한민국 기강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개혁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층 투명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제시했던 개혁과제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사회 개혁의 화두가 되고 있다.
◆문민시대 개막과 군 개혁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당선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헌정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61년 5·16이후 32년 만에 군사정권 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민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당선 직후부터 개혁 바람이 불면서 대한민국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취임 이후에도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군내 최대 파벌이었던 하나회 숙군이었다. YS는 1993년 3월 육사 졸업식에서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이라며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는데, 나는 이 잘못 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 직후 YS는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했다. 당시 권영해 국방장관을 독대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내느냐”고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권 전 장관은 “사표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한다”고 하자, 김 전 대통령은 “그럼 됐다. 바로 이순간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이후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에 이어 1군사령관 3군사령관 등이 모두 전역됐다. 한달만에 하나회 출신들이 주요 보직에서 모두 밀려났다. 율곡비리 사건 관련자들을 징계한 것도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였다. 당시 군 고위층이 군 전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을 적발해 내면서 이종구·이상훈 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가 징계를 받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1950년 미국으로 넘어간 작전통제권 중 평시작전통제권을 1994년 12월 한국으로 반환시켰던 것도 김영삼 정부의 업적이었다.
◆ 민주주의의 진화
1987년 개헌으로 한국 사회의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이 마련됐다면 김영삼 정부에서는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진화·발전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대통령이 국민 곁으로 다가오는 단초를 만든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청와대에서 오찬을 할 때 주로 서민음식인 ‘칼국수’를 메뉴로 정했다. 칼국수를 먹으며 격식을 따지지 않고 국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대통령의 비밀스런 권위의 상징이었던 궁정동 안가는 물론 청와대 내의 골프연습장도 철거했다. 청와대 앞길도 개방해 주말 시민들이 나들이를 하는 풍경은 새로운 변화를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반정부 작품과 사회비판을 널리 허용했다. 군사정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대통령을 희화화 한 ‘YS는 못말려’라는 유머집이 책으로도 나왔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재오 의원 등 민중당 출신을 민자당에 입당시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자치선거를 실시한 것 역시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주자유당은 인천·부산시장, 경기·경남·경북지사에서만 승리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거뒀지만 그는 이같은 정파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지방자치제도의 꽃을 피우는 데 헌신했다.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도 처음으로 도입됐다. YS는 스스로 취임 이틀 만에 17억 7822만원의 재산을 공개했으며 이 여파로 부도덕한 재산 축재 시비를 받은 일부 고위 공직자들이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러나기도 했다. 베일에 쌓여져 있던 고위공직자들의 재산현황을 최초로 공개해 부정부패를 원천차단하고 공직사회가 보다 투명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세계화 추진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던 1993년, 세계는 ‘탈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소련 붕괴·독일 통일 등으로 세계사의 흐름이 뒤바뀌는 대전환의 시기에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세계화’를 추진하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제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 후 호주 시드니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최초로 ‘세계화 구상’을 천명했다. 1995년 1월에는 대통령 직속 ‘세계화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1996년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성사시켰다. 노태우 정부 시절 추진된 북방외교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한 점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세계화 추진은 사회 각 부문 개혁작업과 연결되면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일된 세계중심국가’라는 비전을 세우고 국가이미지 개선, 아시아·태평양시대 주역으로서의 외교활동 강화, 우리 국민의 국제기구 진출 확대, 재외동포사회 활성화 지원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경제 부문에서도 21세기에 대비한 신해양정책,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 부응하는 산업지원체제 개편 방안, 한반도의 동북아 국제물류중심화 전략 등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책 방향이 설정됐다. 이밖에 환경모범국가의 건설, 삶의 질 세계화, 법질서의 세계화 등은 이어진 정부의 개혁작업에 단초가 됐다. 물론 세계화 추진 과정에서 면밀한 전략이 없이 추진된 자본시장 개방 등의 정책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촉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 역사바로 세우기
김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에 큰 비중을 뒀다. 1993년 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며 새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이 총독부 건물 해체를 놓고 전국은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 이전복원론 등으로 분열됐다. 그러나 그의 뜻은 완고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점으로 총독부 청사 중앙돔이 해체에 들어갔고, 그해 8월 서울시 의원들이 역사적 경제적 이유를 들어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는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총독부 건물은 1996년 12월 완전 철거됐다.
역사바로세우기는 임시정부 재평가로도 이어졌다. YS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당시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이승만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봤던 때라 새로운 시도였다. YS는 1993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또 5.16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했다. 종전에는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기술돼 있었지만 YS는 이를 쿠데타나 정변으로 변경하게 했다. 아울러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을 불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세웠
[박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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