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25일로 사흘째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진행하면서 역대 최악의 평가를 받는 19대 국회가 끝까지 ‘제 할일을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비록 합법이라고는 하지만 필리버스터로 국민의 안전·생명과 직결된 테러방지법은 물론 북한인권법과 선거구획정안 등 주요 국정 현안 처리가 모두 마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대테러·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국가기구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부추기고, 심각한 안보위협 상황을 등한시한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26일로 예상되는 선거구 획정안 통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지적 대상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매일경제와 통화에서 “필리버스터가 종종 벌어지는 미국에서도 안보 관련 이슈에 대해 필리버스터가 결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대부분은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법 조항에 적용한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의 70% 이상이 북한 테러와 관련해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한국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도 찬성이 67% 이상이라는 것은 국민의 안전과 안보를 위해 국회가 역할을 하라는 의미”라며 “대테러방지법의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면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지 무조건 법안에 문제 있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야당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내영 고려대 정외과 교수도 “필리버스터는 법적으로 국회선진화법에서 보장하니깐 그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면서도 “문제는 과연 필리버스터까지 동원해서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게 적절한가에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대안 제시이나 의견 수렴의 노력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CBS 의뢰로 24일 전국 성인 532명을 대상으로 야당의 필리버스터 찬반을 조사한 결과(응답률 4.4%, 표본오차 95%·신뢰수준에서 ±4.3%p) ‘반대한다’는 의견과 ‘국회법이 허용하고 있으므로 찬성한다’는 의견은 각각 46.1%, 42.6%로 조사됐다.
필리버스터로 언론과 인터넷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점을 이용해 일부 의원들이 선거활동으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세번째 주자로 나선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단상에 올라 “더민주 성남중원의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활동하고 있는 은수미입니다”라며 자신의 약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에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금 국회 본회의장이 더민주 예비후보들의 ‘얼굴 알리기 총선 이벤트장’으로 전락했다”며 “국민목숨을 볼모로한 희대의 선거운동”이라고 비꼬았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가 국내 정치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다 보니, 자신의 발언시간과 견주는 ‘기록경쟁’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첫번째 주자인 김광진 더민주 의원이 5시간 33분을 기록하며 김 전 대통령의 5시간 19분을 넘어서더니, 세번째 주자인 은수미 더민주 의원은 10시간 18분간 토론해 역대 최장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웠다. 이후 단상에 선 유승희 더민주 의원과 최민희 더민주 의원도 각각 5시간 20분을 기록해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시간을 넘겼다. 이에 대해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누가 오래 버티나 기록 경신장으로 활용하는 정신 나간 짓을 당장 그만두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장시간 발언을 하다보니 당초 논점에서 빗나간 발언들이 나오는 것도 문제다. 은수미 의원은 발언 도중 “세 모녀 사선에서 산재만 적용됐더라도…” “경제적 불평등이나 복지축소를 의미하는 노동개악을 긴급하게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대통령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등 테러방지법과 상관없는 발언을 쏟아내 빈축을 샀다.
안보를 중시한다던 국민의당이 어정쩡한 ‘양비론’을 취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민의당이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존재감이 줄어들자 이날 여론환기를 위해 ‘국회 정보위원회 상설화’를 골자로 한 테러방지법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솔로몬의 해법’은 아니라는 평가다. 더민주 지도부는 중재안에 긍정적이지만, 새누리당은 마뜩치않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상돈 국민의당 공동선대위원장은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이번 대치 국면을 가져온 데는 무엇보다도 여당, 특히 청와대의 책임이 크지만 어떤 필리버스터라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최후 수단 아닌가”라며 양비론을 펼치기도 했다.
야당의 필리버스터 정국이 길어지자 결국 여당은 1인시위로 맞불을 놓고 있다. 25일 오전부터 ‘국회마비 00시간째’라는 푯말 옆에
[김명환 기자 / 정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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