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가 도대체 어떤 전투였길래 이렇게 흥남 피란민 가족들에게 깊은 기억을 남아있을까요.
기록에는 미군이 고전했던 가장 혹독한 전투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주진희 기자입니다.
【 기자 】
한 겨울 피란을 가던 한 무리의 사람들.
멀리서 폭격이 시작되자 가족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합니다.
"지금 중공군들이 흥남 들어왔다!"
"모두 정신 똑똑히 차리라."
1950년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 모습을 묘사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규모의 급박한 철수작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바로 '장진호 전투'가 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개마고원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이 몰려들면서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영하 40도의 개마고원 장진호 호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흥남까지 밀려나게 된 것이 바로 '장진호 전투'.
퇴로가 막힌 미군은 군수물자를 챙겨 흥남에서 빠르게 철수해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무기를 버리고 대신 피란민 10만 명을 태운 것이 바로 '흥남 철수'인 겁니다.
"안 됩니다. 배 안은 무기들로 꽉 차있습니다. 피란민들 태울 자리가 없습니다."
"장군의 명령이다. 선적한 무기들을 모두 버리고 지금부터 피란민들을 배에 태운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 부모도 이 배를 탄 겁니다.
1만 5천 명의 연합군이 무려 12만 명의 중공군에 포위된 채 싸워야 했던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고전한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이며 사망자만 5천 명에 달합니다.
MBN뉴스 주진희입니다.[jhookiz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