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와 계약 사회에서 갑과 을은 분명히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대등관계지만, 현실은 갑이 을보다 훨씬 우월한 특권을 누리곤 합니다.
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몇 가지 사건들을 보면 갑과 을이 어떤 관계인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남양유업에서 우유와 유제품을 납품받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대리점주 10여 명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본사가 대리점이 주문한 물량보다 2~3배 많게 강제 할당해 떠넘기는 이른바 밀어내기가 다반사였다고 주장합니다.
그 물량 가운데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버려지는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울분을 토합니다.
창고에는 이렇게 억지로 넘겨받은 뒤 유통기한이 지나 팔지도 못한 제품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 인터뷰 : 이창섭 /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 연합회장
- "밀어내기 물량을 저희가 처리할 수 없으니까, 그걸 버리게 되고 나눠 먹게 되고. 몇 년에 걸쳐서 몇 억대 손실을 본 분이 여러분 계세요."
▶ 인터뷰 : 김대형 / 현 남양유업 대리점주
- "한 달 평균 제가 해보니까. 1천만 원씩은 손해를 봤더라고요. 아파트 팔고, 지금은 단칸방에 살고 있어요. 다섯 식구가."
제품 중량을 줄였는데도 이를 감추고 돈은 그대로 받는 수법도 썼습니다.
본사 영업사원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은 대리점주들에게 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계약 해지를 빌미로 명절 '떡값'과 리베이트를 요구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민망하지만, 이 영업사원이 대리점 소장에게 한 전화내용을 잠깐 들어보죠.
▶ 인터뷰(☎) : 남양유업 영업사원
- "죽기 싫으면 받아요. 좀. 죽기 싫으면 받으라고요. 버리라고요. 그럼 망해, 망하라고요. 이 000아. 그렇게 해줬으면 됐잖아. 자신 있으면 00 들어오든가. 이 000야. 싸우자. 00 같은 00야. 받으라고 000아."
해고됐다는 그 영업사원은 업계 관행이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갑 중에서도 슈퍼 갑으로 군림한 것 같습니다.
대리점들이야 죽든 말든 관계없이 회사 수익만 내면 된다는 문화가 혹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부당한 횡포에 더는 참지 못한 '을'이 반란을 일으켰고,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소비자들은 남양유업 불매운동으로 '갑'을 혼내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대기업 임원이 비행기 안에서 여승무원에게 '갑' 노릇을 하다가 해임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라면이 덜 익었다', '서비스가 왜 그러냐'며 승무원 얼굴을 잡지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SNS에서는 이 회사와 이 임원을 패러디한 사진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 인터뷰 : 전 승무원
- "이런 일들이 되게 비일비재해요. 주문하셨는데 빨리 안 갖다 준다고 언성 높이시다가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신 분들도 실제로 있었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을 중소제과업체 회장이 폭행한 일도 있었습니다.
중소제과업체 회장 강 모 씨가 호텔 현관 서비스 지배인 박 모 씨를 폭행한 겁니다.
차를 빼달라는 직원의 말이 뭐가 그렇게 불쾌했는지 욕설과 함께 폭행을 했을까요?
▶ 인터뷰 : 강 모 씨 / A 제과업체 회장
- "지갑으로 한 차례 때린 것밖에는 없습니다. 무조건 (차를) 빼라고 해서 시비가 된 겁니다."
분노한 누리꾼들이 이 회사 홈페이지를 마비시켰고, 이 회사가 납품하는 코레일 측은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결국, 이 회사는 직장 폐업 신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강 회장 역시 코레일한테는 '을'에 불과한데, 호텔 직원에게는 '슈퍼 갑'으로 군림했던 셈입니다.
<그럼 여기서 전문가와 함께 을의 반란이 왜 일어나는지, 또 왜 갑의 횡포는 없어지지 않는지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박사입니다.
1. 최근 을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그만큼 억눌렸던 게 폭발했다는 뜻인가요?
2. 사실 을의 처지에서 보면 부당하다는 걸 알지만, 불이익을 받을까 보복을 당할까 싶어 참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진 건가요?
3. 갑을 관계라는 게 주종 관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나 기업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
4. '돈의 맛'이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만, 소위 상류층이나 있는 집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특권의식은 없어지기 어려운 건가요?
5.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우월적 관계는 어찌 보면 없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우리 사회가 좀 더 평등하고 갑과 을이 공존하는 방법이 있다면 혹시 조언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사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는 갑에게 당하는 을이 참으로 많을 것 같습니다.
을이 있어야 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그렇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갑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점잖게 충고하는데요.
그러다 정말 큰코다칩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런 부당함과 횡포에 대해 더는 침묵하거나 방관하지는 않습니다.
사법 기관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SNS와 인터넷을 통해 평범한 시민들이 용서치 않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평등사회로 가는 것 같아서 기분 좋습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