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업준비생(취준생) 정 모씨(25)는 최근 한 온라인 대필업체를 통해 다섯 군데 기업의 자기소개서를 45만원에 샀다. 작문에 능한 유수 대필 전문가로 구성된 이 업체에 간략한 인적사항과 소개글을 보내주니 이틀만에 완성본을 메일로 받았다. 정씨는 “혼자서 일일이 쓰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며칠만에 양질의 자소서를 받아 다행”이라며 “내 주변에 자소서 컨설팅이나 대필업체를 이용하는 친구들은 이미 흔하디 흔하다”고 했다.
#2. 부모에게서 매달 40만원씩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지방 소도시 출신인 장기 취준생 고 모씨(27)는 이번 만큼은 기필코 직장을 구해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 그러나 올해 유독 자기소개서 비중이 커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른 스펙 준비하기도 벅찬데 작문 실력가지 갖춰 놓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씨는 “기업이 요구하는 문항에 맞춰 한땀한땀 눌러쓰고 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유전취업(有錢就業) 무전백수(無錢白手).’ 돈이 있어야 취업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사교육의 ‘어두운 손길’이 취업시장까지 뻗쳐갔다. 올해 기업들이 신입 사원 채용전형에 자기소개서를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내세우면서 암암리에 돈을 주고 자기소개서를 사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부유한 취준생과 가난한 취준생들 간에 취업준비에도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매일경제신문 취재 결과 서울 강남구에만 자소서 컨설팅·대필 업체가 30군데가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업체들은 전직 대기업 인사담당자 뿐만 아니라 현직 대학 강사와 전직 신문기자 등을 두루 영입해 성업중이었다. 이들 업체들은 “프로들이 달라붙지 않고 아마추어처럼 제 필력만 과신하면 낙방한다”며 취준생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자소서 컨설팅을 제공하는 업체의 상당수는 면접, 어학 등 취업 전반을 아우르며 수십억원 상당의 연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자소서 대필 강사를 ‘작가’로 부르면서 “문예 코치를 받지 않으면 합격 확률도 요원하다”며 공포 마케팅에 여념이 없었다. 자소서 컨설팅업체와 대필 업체는 이제 ‘문예 창작’에 버금가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취준생들의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취업컨설팅 관계자는 “주요 대기업 인사팀 출신 등 유수 강사들이 글쓰기 코치에 들어간다”며 “주 5일 코스로 50만원에 강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루 꼴로 10만원을 내야 하는 셈인데 가난한 취준생 입장에서 주머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자소서 대필 업체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컨설팅 업체는 취준생이 직접 쓴 자소서를 강사가 컨설팅 해주는 수준에 그치지만, 대필 업체는 돈만 내면 한 편의 그럴듯한 창작물을 만들어준다. 이들 업계에 따르면 대필자는 논술 강사, 전직 기자, 대학 강사 등 글쓰기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로 포진돼 있다고 한다. 최근 한 대필업체를 통해 자소서를 구입한 취준생 임 모씨(28·여)는 “기초 정보만 간단히 알려줘도 완성도 높은 자소서를 구할 수 있는데,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냐”고 했다.
한 대필 업체 관계자는 “개인 인적사항과 간략한 소개 정도만 보내주면 작가가 2~3일 내로 완성본을 준다”며 “A4용지 2장 이내의 경우 5만~10만원 선에서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다른 대필업체 관계자는 “작가가 하루만에 작성해주는 ‘긴급서비스’도 신청할 수 있다”며 “2만~3만원 추가 금액이 붙지만 하루 30건 이상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라고 귀뜸했다.
돈으로 자소서를 맞바꿔 취업시장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구조이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는 사회라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라며 “취업시장마저 돈의 많고 적음이 영향을 미치는 현대판 음서제가 만연할까 우려스럽다”고 했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돈으로 산 ‘가짜 에세이’를 걸러내기 위한 기업들의 자구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에세이 문항을 강화시킨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라며 “비용이 더 들더라도 심층적인 에세이 검증이 가능한 시스템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시균 기자 / 오찬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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