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한쪽에서는 ‘쌍용차 투쟁의 영웅’. 다른 한편에서는 ‘공장불법점거 폭력시위 주동자’라는 타이틀로 그를 지켜봤다.
바로 민주노총 쌍용자동차 지부장이었던 한상균이다. 투쟁의 영웅과 불법의 원흉이라는 두 개의 프레임에서 당시 기자는 의경으로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그의 모습을 똑똑이 지켜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의경들 사이에서 그는 두 개의 사회적 프레임과 거리가 먼, 그저 ‘잠을 앗아가는 남자’로 불렸다. 공장점거 사태로 인해 모든 의경들이 평택 공장에서 3시간에 불과한 쪽잠으로 극한의 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잠’이 뭐가 대수냐고 하겠지만 근무를 서다가 졸고 있으면 이내 볼트가 날아와 방탄 헬멧을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기억은 아찔한 위험이었다.
당연히 모든 의경이 그를 원망했다. 섭씨 32도를 넘는 끔찍한 무더위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복사열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진압장비로 중무장을 하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잠깐 장비를 내려놓고 싶어도 날아오는 볼트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
부족한 잠, 더운 날씨, 비위생적 환경, 비정상적인 장기간 근무 탓에 탈진자가 속출했다. 좁고 냄새나는 경찰버스에 달린 TV에 그의 얼굴이 나올 때면 이내 거친 말들이 버스 안을 휘감았다.
지옥 같은 평택 현장에 익숙해질 무렵. 공장 점거 근로자들을 면회 온 한 가족의 얼굴을 봤다. 공장 철책 너머로 가족을 바라보며 눈물 짓던 노동자의 얼굴도 느린 화면처럼 시선에 들어왔다. 순간 머리에 둔탁한 것을 맞은 듯한 아찔함과 함께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왜 이들은 공장을 점거하게 됐을까…’.
‘왜?’라는 질문과 함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분명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이들이 공장을 점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는 정확한 시선으로 이를 지켜보고 원인을 파악하며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존의 처절한 전쟁터에 투입돼 무더위와 피로에 투덜대던 그 가볍던 시절에 이 날의 물음표는 생전 처음으로 ‘기자’라는 직업에 도전하고 싶다는 동기가 됐다.
신기하게도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하려 한 이후 공장 안 농성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사라졌다. 화염병을 만들어 던질 때도, 헬멜을 잡아당기며 욕설을 내뱉을 때에도, 분노에 차 쇠파이프로 기자의 진압방패를 내려칠 때도 그랬다. 너무하다 싶어 원망의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올라올 때면 책과 시사잡지를 펼치며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의 이슈를 구조적으로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이후 6년이 흐른 2015년 10월. ‘수습’ 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마침내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됐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혈기왕성했던 청년의 잠을 앗아갔던 그 남성이 직책이 바뀌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여전히 그에 대한 세상의 프레임은 극명하게 두 시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난 5월 노동절 집회에서 불법 폭력행위를 행사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돼 수배 중인 그는 16일 조계사에 은신해 경찰과 대치 중이다.
사회부 경찰팀 소속으로 이날부터 연일 조계사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이른바 ‘뻗치기’ 취재를 하고 있는 수습기자의 눈에 그는 여전히 많은 생각을 안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6년만에 다시 쪽잠의 세계로 안내한 가혹한 존재이거니와 여전히 “왜 그는 조계사까지 다다랐을까”라는 질문을 안기고 있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과 조계사 측 대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가 조계사라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이유를 이제 막 세상을 알기 시작한 ‘수습기자’가 평가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그가 6년이 지나 여전히 거친 방식으로 세상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고 불교의 성지에 몸을 숨긴 상황 은 분명 안타까움을 넘어 이제는 반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할 시점이 됐다.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예외 없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게 지금의 한국사회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개인과 개별집단의 이해 관계가 사회 전체의 이익과 다르게 움직일 때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갈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안타깝게도 ‘한상균’ 이라는 이름은 갈등의 표출 양상이 그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극단’의 방향을 가리켜 왔다.
매일 조계사 앞에서 그를 취재하고 있는 기자에게 그는 2009년 여름처럼 많은 생각을 던지게 하고 있다. 법의 심판을 목도하고 있는 그는 6년 후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한국 사
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떠나 한 가지를 꼭 당부하고 싶다. 사회적 갈등에 대한 잘못된 저항 방식은 그 실체를 정확히 보려는 사회적 노력마저 흩트릴 수 있다. 어쩌면 법적 심판에 우선해 그는 이런 사회적 책임에서 지금 뼈저린 반성을 해야 한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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