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관행처럼 이어져왔던 정치 비리를 처음 끊고 가자고 말씀하셨던 분이셨죠. 본인도 깨끗했지만, 지속적으로 투명 사회를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셨어요.” (금춘수 한화 사장)
“YS시절 유럽 법인장으로 나가 있었는데 당시 선진국에서 보편적이었던 금융실명제가 한국에 도입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이제야 도입되는구나’ 했었죠. 그런데 당시 상황을 놓고 보면 ‘첫발 떼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끝까지 관철시켰구나’는 생각이 들었지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를 한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20대 그룹 고위 임원)
재계는 22일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1호 청렴’ 대통령으로 기억했다.
청와대 재직 시절 기업으로부터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고, 당시 만연했던 정경 유착 비리 사슬을 끊으려고 애썼던 족적이 경제·산업계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는게 중론이다.
YS를 기억하는 기업인들은 “금융실명제도 큰틀에서는 한국 경제에 약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준비없는 시장개방으로 1997년 전례 없는 외환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은 경제 약점으로 지적됐다.
◆정치자금 관행 근절
이전 군사정권 지도자들은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측근이나 친인척들에게 나눠주고 권력 관리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같은 정치 자금 수수 관행을 단호히 근절했다.
청렴한 문민정부는 김 전 대통령이 취임 때부터 챙겼던 사안이다.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고, 같은해 국가기강확립 보고대회에서도 “새 정부에 있어 국가기강 확립 대도(大道)는 하나도 윗물 맑기요, 둘도 윗물 맑기다”라고 강조했다.
정권말에는 아들인 현철씨와 홍인길 전 수석 등 실세 부패로 빛이 바랬지만, YS는 끝까지 검은 돈을 만지지 않았다. YS 이후 역대 대통령들 모두 대기업들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례는 없었다.
재계는 모두 이같은 치적에 방점을 찍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는 “김 전 대통령께서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를 통해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기여했다”고 논평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고인이 오랜 기간 민주화를 위한 열정과 헌신을 통해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며 “경제 선진화 기틀을 마련한 고인의 업적을 기린다”고 밝혔다.
◆이건희·정주영과 인연 깊어
재계 총수들과는 애증이 교차했다. 사면권을 활용해 기업활동 길을 열어주면서도 총수들 특정 발언에 대해서는 강하게 ‘그립’을 잡으며 완급을 조절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는 인연이 깊다. 이 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 방문시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일갈하면서 문민정부에서 한동안 큰 곤욕을 치렀다.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듬해 김 전 대통령이 특별 사면·복권했다.
정 명예회장은 14대 대선에 출마, 당시 여당 후보였던 김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 관계가 이어졌다.
정권 초 한동안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정 명예회장은 대선 패배 직후인 1993년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고,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만 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복권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빈소를 직접 찾아가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게 “우리나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인데, 그런 족적을 남긴 분이 가시니 아쉽다”고 조문하며 ‘사후 화해’를 했다.
◆중기청 창설..벤처 뿌리 살려
중소기업계에서는 김 전 대통령 중기 중심정책으로 벤처 뿌리가 살아났다고 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청을 처음으로 만들어 중기 중심정책을 편 대통령이다. 중소기업청은 1996년 2월 산업통상자원부(당시 통상산업부) 내 중소기업국에서 외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현재 중앙행정기관이 되는 기초가 됐다.
중기청 창설 때부터 조직에 몸 담았던 최수규
[김동은 기자 / 김정환 기자 / 진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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