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비서실장 이원종,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 비서실장 이원종/사진=연합뉴스 |
이원종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은 체신부 서기보(9급 공무원)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뒤 지방 행정의 최고봉인 시장·도지사를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행정의 달인'으로 불립니다.
입지전적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공직 입문 당시 상황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소나무 껍질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을 정도로 가난해 고교 진학은 꿈꿀 수 없었던 그는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주는 국립 체신학교에 입학, 인생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1963년 체신부 서기보로 공직에 입문, 공중전화 수금원으로 일했던 그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면서 야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66년 제4회 행정고시에 합격, 특유의 성실성과 행정실무 능력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기 전까지 그는 서울시에서 근무하면서 5개 구청장을 지냈으며 고향인 충북에서 관선 지사를 역임한 뒤 1993년 지방 행정의 최고봉인 '서울시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재임중 발생한 성수대교 참사로 경질됐습니다.
하지만 민선으로 1998년 자민련 소속의 충북도지사에 선출, 재기했습니다. 제천에서 출생한 그는 "박달재(제천 지명) 알쫑이(알토란 같은 원종이)가 여러분의 선택을 희망으로 갚아주겠다"는 당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어 2002년에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다시 충북도지사에 선출, 관선과 민선을 합쳐 3차례나 충북 도정을 이끄는 등 화려한 행정 경륜을 쌓았습니다.
특히 그는 충북도지사 때 2002년 오송국제바이오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 충북을 바이오와 정보기술(IT)의 대표 지자체로 자리매김시켰고, 충북 오송역을 호남 고속철도 분기역으로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성과 등의 이유로 그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면서 3선 불출마를 전격적으로 선언, '용퇴'했습니다.
그는 이어 2013년 6월 박 대통령이 지역발전위원장으로 발탁하면서 7년 만에 공직에 복귀했다 당시 "평생 공직에 몸을 담았던 내게 주어진 마지막 의무"라면서 지역발전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여소야대(與小野大) 3당 체제 속에서 국정 과제를 완수해야 하는 박 대통령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임무로 세 번째 청와대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 행정관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비서관으로 각각 청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충북지사 시절 비서실 직원도 모르게 맏딸 결혼식을 치르는 등 소탈한 스타일입니다.
자기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친화력이 강점이며 재담이 뛰어나 "누구든 만나서 30분만 대화하면 '이원종 맨'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지역발전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국무총리 인사 때마다 후보 중 한명으로 거론돼 왔
▲ 충북 제천(74) ▲성균관대 행정학과 ▲ 청와대 비서실 행정비서관 ▲ 충북지사 ▲ 서울시장 ▲서원대 총장 ▲ 민선 충북도지사 ▲ 대통령직인수위 법무행정분과 자문위원 ▲ 한국지방세연구원 이사장 ▲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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