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물질이 섞인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해 다수의 사상자를 낸 업체 관계자들이 5년 만에 법의 심판을 받았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형사상 책임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피해자를 중심으로 일각에서는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어 향후 관련 처벌 법규를 정비해야 한다는 여론도 크다.
실제로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가 선고한 형량은 검찰의 구형량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검찰은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옥시·현 RB코리아) 대표(69)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인체에 안전' '아이에게도 안심' 등 거짓 광고로 제품을 판매해 이득을 챙겼다는 사기혐의는 무죄로 인정된 탓이다. 재판부는 이날 신 전 대표에 대해 "당시 가습기살균제에 함유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의 농도가 낮고 해당 물질이 유독물로 지정되지 않아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인식해 사기의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다수의 소비자가 사용하는 제품에 대해서는 법을 고쳐서라도 '사기의 의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거짓 광고'를 표시했다면 그 자체로 사기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법정에 참석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 역시 선고 형량에 불만을 터뜨렸다. 2012년 딸 다민 양(사망 당시 2세)을 잃은 김아련씨(40)는 선고 직후 피고인들을 향해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라.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며 울부짖었다. 그는 "거라브 제인 전 대표(48·인도) 등도 다 와서 벌을 받아야 한다"며 "또 다시 글로벌 기업에게 당하지 않도록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해달라"고 말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휠체어에 탄 임성준 군(14)도 어머니 권미애씨(41)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권씨는 "재판부에 '(피고인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피해자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써서 빌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징역 7년 갖고 되겠냐"고 말했다. 또 "아이가 14개월부터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고 지금은 폐가 10살 수준으로 기능이 30% 밖에 안남았다"며 "20살까지만이라도 버티라고, 5년 동안 더 나빠지지 않게 돌봐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들과 함께 재판을 지켜본 박동석 옥시 대표는 "법원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 절차를 실현하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신 전 대표 등 옥시 관계자들은 2000년 '옥시싹싹 뉴가습기 당번'을 제조·판매하며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아 사망 73명 등 181명의 피해자를 낸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상 등)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29일 결심공판에서 "신 전 대표는 허위 광고로 소비자를 속여 영유아를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게 했고, 부모들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채 살아가게 했다"며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한편 이날 판결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2008∼2011년 피해자들은 국가와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당초 피해자와 유족 총 13명이 옥시와 한빛화학 등을 상대로도 소송을 냈지만, 2015년 10월 세퓨를 제외한 모든 업체가 피해자들과 조정에 합의했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은 "제조업체 세퓨가 피해자 또는 유족 총 10명에게 1인당 1000만∼1억원씩 총 5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환경보건시민센터가 2011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임신부와 영유아 등이 급성 폐질환으로 숨지자 유가족 등 110여 명을 모아 2012년 관련 업체들을 검찰에 고소·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사건이 4년 가까이 방치됐다가 2016년 1월 26일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이철희)에 전담 수사팀이 꾸려지고 검사 6명이 투입되면서 뒤늦게 수사에 속도를 냈다. 같은 해 4월 검찰은 옥시 측 의뢰를 받아 작성한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구팀의 실험 보고서가 조
이후 옥시의 증거조작·은폐 의혹이 잇달아 제기되면서 범국민적인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5월 2일 아타 샤프달 옥시 한국법인 대표가 직접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또 독립된 패널기구를 구성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겠다고 밝혔다.
[이현정 기자 / 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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