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서민교 기자] “죄송하다, 고마웠다.”
김기태(45) LG 트윈스 감독은 자진 사퇴 표명 직후인 새벽, 그 어떤 사퇴 이유에 대한 설명 대신 두 마디 말만 남겼다. 김 감독이 꺼내든 마지막 반전 카드는 극단적인 자기희생이었다.
김 감독은 지난 23일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구단의 적극적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 사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LG 남상건 사장과 백순길 단장은 1박2일 동안 꼬박 밤을 새우며 김 감독을 설득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한 번 뱉은 말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킨다. 그만큼 깊게 고심을 하고 결정한 뒤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결국 김 감독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구단은 사퇴 확정이 아닌 여지를 남겨뒀지만, 김 감독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 김기태 LG 트윈스 감독이 지난 23일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갑작스런 김 감독의 자진 사퇴에 야구계는 충격에 빠졌다. 사진=MK스포츠 DB |
김 감독의 이름 앞에는 ‘형님 리더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선수단과 돈독한 신뢰를 형성했다. 고참급 선수들을 예우하고 젊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선수들도 누구 할 것 없이 늘 김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감독’ 타이틀이 아닌 믿고 따르는 ‘형님’이었다.
김 감독은 권위 의식을 버리고 낡고 낮은 둥근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말도 아꼈다. 항상 자신보다 코치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모래성’을 ‘가족’으로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LG의 오랜 흑역사를 지우고 11년 만에 가을야구 꿈을 실현시켰다. 지난 10년간 LG 지휘봉을 맡은 사령탑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그러나 정작 김 감독은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기대 성적’의 짐이 무거웠나 보다. 사령탑에 앉은 이후 수많은 사건사고를 이겨내면서 성적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살았다. 지난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자신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를 슬며시 꺼낸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마친 뒤 가진 조촐한 술자리에서 “지금 내가 사퇴하면 어떨 것 같나?”라고 물었다. 뜻밖의 당황스런 질문에 동석했던 기자들도 할 말을 잃었다. 당시 김 감독은 질문의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다. 웃으며 농담조로 던진 한 마디였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진심은 엿보였다.
그리고 5개월 뒤 그때의 본심을 꺼냈다. 시즌 개막 17경기만의 자진 사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팀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뒤 구단 고위층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이 팀을 위한 마지막 반전의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시즌 도중 팀을 떠나면서 많은 비난을 받겠지만, 모든 걸 감수하고 떠나는 것이 수장의 책임”이라는 의미의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감독이 사퇴 의사를 굳힌 결정적인 이유는 반전 분위기가 없이 끝없이 가라앉는 팀 분위기 때문이다. 선수단이 지난 22일 대구 삼성전에서 전원 삭발 의지를 보이고도 무기력하게 완패한 뒤 최종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올 시즌 내내 꼬였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책임을 끝내 자신에게 돌린 것이다. 최근 대전 한화전에서 나온 빈볼로 인한 벤치 클리어링 사건은 김 감독의 사퇴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김 감독을 잘 아는 측근들의 설명이다.
↑ 김기태 감독은 왜 스스로 떠났을까. 김 감독은 사퇴 의혹을 뒤로 하고 성적 부진의 모든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사진=MK스포츠 DB |
이런 의혹들에 대한 LG의 입장은 단호했다. LG 구단 관계자는 “전혀 사실과 다른 의혹들이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구단은 김 감독을 믿고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선수단 구성, 코칭스태프 전면 교체, 해외 전지훈련 등 김 감독의 뜻을 존중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외압은 절대 없었다. 선수단과의 문제도 단언컨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구단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다. 김 감독의 사퇴 뜻을 돌리기 위해 밤을 새며 왜 만류했겠나? 팀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하며 자신을 희생한 김 감독의 진정성 있는 뜻이 사실과 전혀 다른 의혹으로 퇴색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의혹을 뒤로 하고 홀연히 떠난 김 감독은 “죄송하다. 고마웠다”라는 짧
김 감독은 LG 사령탑으로 135승138패5무(승률 0.495) 성적을 냈다. LG의 10년 암흑기를 청산한 김 감독의 쓸쓸한 퇴장. 마지막 떠나는 방식도 누구의 탓도 아닌 ‘내 탓이오’라고 외친 김기태 스타일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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