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입니다. MK스포츠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과 LG-SK 야구단 단장, 대구FC 사장을 지냈던 최종준 MK스포츠 전문위원과의 대담을 통해 스포츠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최종준의 스포츠人탐색’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그가 만난 첫 번째 스포츠인은 한화 감독 시절 ’야왕’이란 별명을 얻었고 지금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원한 ’해결사’ 한대화입니다. (편집자 주)
↑ 최종준 MK스포츠 전문위원이 한대화 KBO 경기운영위원과 진솔한 대담을 가졌다. 사진=천정환 기자 |
최종준 위원(이하 최)= 오랜만입니다. LG 야구단 단장 시절부터 워낙 인연이 깊은 분이라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특히 좋아했던 선수이자 야구인이시죠.
한대화 위원(이하 한)= 아, 그런데 막상 LG에서 떠나보내셨잖아요? (웃음)
최= 오해십니다. 조금 뒤에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정리해보죠. KBO 경기운영위원이 하는 일이 많죠? 팬들 중에는 더러 우천취소 전문으로만 알고계신 분들도 많지만……. (웃음)
한= 경기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이 아무래도 팬들 눈엔 가장 많이 보이죠. 경기가 시작되면 더 바빠집니다. 심판들의 운영을 평가하는 역할도 중요하고, 양 팀 선수들이 규정에 맞게 경기를 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지켜봅니다. 합의판정 때는 심판과 함께 비디오 판독도 합니다. 벤치클리어링이라도 발생하면 전후 상황을 파악해서 객관적인 보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최= 결국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내내 그라운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일이군요.
한= 올해는 전날 경기 장면을 하루 뒤에 다시 돌려보면서 재검토하는 일도 추가됐습니다. 혹시라도 심판 판정이나 선수들 플레이에 의심스러운 상황은 없었는지 철저하게 모니터합니다.
최= 현장에서 경기를 보던 때와 느낌이 다를 것 같습니다.
한= (현장에서는) 잘 안보이던 앵글의 구석구석을 보게 되니까 경기를 보는 시각이 좀 더 다양해졌습니다. 특히 영상을 통해서 보면 전체적으로 경기내용이 더 세밀하게 보입니다.
최= 감독의 총체적 역량이 중요한 시대가 됐는데 끊임없이 공부하는 기회도 되겠네요. 전직 감독들은 늘 새 감독 자리의 후보군이잖아요. 이맘때는 혹시 어디서 전화가 오진 않을지 기다리게 되지 않습니까. (웃음)
한=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만, 그런 욕심이 있다면 늘 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겠죠.
최= 한때 구단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말씀 드리자면 프런트는 계속 공부하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건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
최= 최근 몇 년 새에 신축구장이 (크게) 늘어났는데 (경기) 우천취소 확률은 좀 떨어졌나요?
한= 새 구장들이 배수 시설이 좋아서 비슷한 상황이면 예전보다 경기 진행이 좀 더 수월하긴 합니다. 그래도 내리는 비에는 장사가 없어서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죠.
최= 메이저리그는 30개 팀이 팀당 162경기를 해도 시즌 막판에는 잔여경기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10개 팀이 144경기씩 하는데 왜 이렇게 소화율이 차이가 나죠? 시즌 막판 치열한 순위싸움을 하는데 잔여 경기 수 차이가 큰 변수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 그게 참 하늘에 달린 문제라……. 올해 NC가 특히 특이한 상황이었죠. 이상하리만큼 비를 몰고 다녔습니다.
최= 이래서는 시즌 막판에 공정한 경쟁이 안 되는 느낌입니다. 중간에 더블헤더를 하든, 월요일 경기를 하든 어느 정도 우천취소 경기를 그때그때 소화해서 시즌 막판에 일정이 ‘변수’가 되는 그림은 줄여야 할 텐데요.
한= 더블헤더나 월요일 경기는 현장의 의견을 조율할 부분이 있어서요. 아니 왜 저한테 이렇게 곤란한 논점을……. (웃음) 리그와 각 팀들이 좀 더 대승적 차원에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 한 가지 확실한 건 KBO의 규정은 현장 중심 보다 팬 중심의 규정이 돼야합니다.
한= 돔구장이 하나 더 있으면 바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웃음)
↑ 한대화 KBO 경기운영위원은 현역 지도자였던 때와는 다른 앵글로 경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을 배움의 기회로 생각한다. 사진=천정환 기자 |
최= 원래 가족 중에 운동하신 분은 없으시죠? 어떻게 야구를 시작하셨죠?
한=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다했습니다. 농구도 하고, 씨름도 하고...
최= 혹시 공부 빼고 다 잘한다는 만능 스포츠 소년이었나요? (웃음)
한= 비슷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던지기 대회에 나가서 3등을 했더니 당시 야구부 감독님이 야구를 권하셨습니다. 5학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죠. 일주일이 멀다하고 신발이 떨어져서…….
최= 한밭중과 대전고를 다니셨죠. 전국구 야구선수가 된 건 고등학교 때로 봐도 될까요?
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78년 9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렸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었죠. 그 대회를 앞두고 한일전 친선경기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결승타와 좀 인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결승타를 쳤죠. 그리고 베네수엘라로 갔는데, 예선에서 쿠바랑 만났을 때 또 결승타를 쳤고요. 쿠바랑 동률이 되면서 결승전을 한 번 더 했고 거기서 져서 준우승했습니다.
최= 당시 대표팀에서 같이 뛰었던 동료 선수들이 누구였죠?
한= 이상윤이 에이스였고, 장호연 양상문 이상군 등의 투수들이 있었습니다. 김상훈 양일환 양승호 김광림도 같이 갔고요. 김영덕 감독, 김성근 코치님이었습니다.
최= 동국대 재학 시절이었던 1982년에 그 유명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있었죠. 결승 한일전에서 나왔던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스리런홈런은 지금도 많은 분들이 회고하는 명장면입니다. 야구선수 한대화를 ‘전국구 스타’로 만든 순간이었잖아요.
한= 사실 그 대회 때 진짜 기분이 좋았습니다. 연애할 땐데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고 출전했었어요. 첫 경기 이탈리아전은 못 뛰었고, 두 번째 경기부터 3루수 선발로 나갔습니다. 내내 9번 타자였는데 타율, 홈런, 타점을 가장 많이 올리면서 일본과의 결승에선 5번 타자로 승격됐습니다.
최= 대한민국 스포츠史를 장식했던 상당히 극적인 장면 속의 주인공이셨습니다.
한= 결승전 8회의 역전 결승 3점 홈런이 워낙 임팩트가 강했던지 경기가 끝나자마자 주위에서 저한테 꽃다발을 걸어주고 사진도 찍으면서 MVP라고……. 기분 다 내고 난 다음에 ‘정정하겠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웃음) MVP는 선동열이었죠. 다들 흥분해서 누군가 실수했던 거죠.
최= 그 때부터 선동열감독과 인연이 깊었네요.
한= 그 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서 3승을 했으니 제가 생각해도 MVP는 선동열이 맞아요. 근데 꽃다발 걸어주고 플래시 터지니까 저도 얼결에 두 손 번쩍 들고 포즈 취하고. 그때 잘못 찍었던 사진이 어디 남아있으면 참 재미있겠네요.
최= 저한테는 2003년 SK와이번스 한국시리즈 우승 티셔츠가 있습니다. 7차전까지 갔으니 안만들 수는 없고 다 찍었는데 (현대에게) 졌죠. 다음날 전량 폐기하러 보내는데 한 장만 얻어 집으로 들고 왔습니다. 사실 역사를 왜곡하는 티셔츠죠.(웃음)
프로 데뷔는 고향팀 OB에서 했지만, 해태로 일찍 트레이드 되어서 전성기 타이거즈 시절에 워낙 큰 활약을 하셨습니다. 한 가지 짚어보고 싶은 에피소드는 김응용 감독의 ‘더그아웃 발길질 사건’입니다.
한= 이제 전모가 알려져서 숨길 것도 없고요. 1993년 사직구장 올스타전이었는데, 당시 사직구장 인조잔디가 워낙 악명이 높았습니다. 슬라이딩 한 번 잘 못해도 화상 수준으로 데어서……. 제가 수비 때 손을 데어서 얼음찜질을 하느라 대기타석을 못 나가고 있었는데 김 감독님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오셔서 발길질을 하신 거죠. 당시 제 사정을 정확히 몰라서 오해하셨습니다.
최= 그렇게 해명됐지만, 김 감독과 한대화 간에 감정적 골이 깊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많았어요. 그해 연말에 해태를 떠나게 되기도 했고…….
한= 솔직히 당시 연말마다 연봉협상을 하느라 구단과 많이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감독님과 서로 섭섭함이 있었을 수도 있죠. (웃음)
최= 하긴 겨울에 돌연 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화제를 많이 불러 일으켰던 선수였잖아요.
한= 산에 들어갔던 건 연봉협상 때문이 아니고, OB에서 트레이드 됐을 때 야구 안한다고 산에 47일간 들어갔던 적이 있었죠.
↑ 한국 청소년대표팀이 첫 출전한 세계선수권대회였던 1978년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한대화는 쿠바와의 예선에서 결승타를 쳤다. 당시 대표팀에는 이상윤 장호연 양일환 양상문 이상군 등의 투수와 김상훈 한대화 양승호 박철영 김동재 등의 타자들이 있었다. 사진=MK스포츠 DB |
한= 사실 그 전에 (해태) 구단은 빙그레랑 먼저 카드를 맞춰봤었다고 하는데 잘 안됐는지 LG로 가게 됐죠. 그때는 제가 스스로 선수 생활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라 솔직히 고향팀(빙그레)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크긴 했었습니다. (웃음)
최= 제가 LG의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1990년 우승 후 팀의 이미지와 인기를 상당히 끌어올렸지만, 구단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한 수를 더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1993년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그 타이밍에 승부수가 필요했다고 할까요. LG의 세련된 이미지에 뭔가 경기 내적으로도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선수를 원했는데, 솔직히 제가 당시 해태타이거즈의 강한 규율과 한대화 선수의 킬러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죠. 사실 (LG) 현장에서도 선뜻 OK를 해주진 않았던 모험적인 거래였습니다. (웃음)
한= 실제 트레이드 발표 후 난리가 났었잖아요. ‘미스터LG’를 내보내시고 단장님도 ‘나가라’ 소리 좀 들으셨을 텐데…….
최= 팬들에게 욕먹은 건 당시 해태 이상국 단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 구단 전화기에 불이 나고 저는 ‘폭탄테러’ 협박 전화도 받았었죠. 그렇지만 LG의 한대화 영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선수들의 팀워크도 잡아줬고 다음해 우승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우승 한 다음에 엄청 두려웠습니다. 해태에서 연봉협상 때 마다 악명 높았던 스타인데, 우승까지 했으니 한대화가 얼마나 세게 나올까. 잔뜩 긴장하고 협상장에 들어갔는데 어라, 도장을 주셨잖아요. 목도장을……. 백지위임을 한 것이죠.
한= 연봉싸움은 해태에서 원 없이 해봤고요. 그때는 연봉보다 하나만 바라고 있었죠. 선수 생활도 많이 남지 않았으니 LG에 뼈를 묻겠다고. LG에서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바람 하나였죠. 저는 LG에서 선수 생활 마무리하고 코치 생활까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구단으로 절대 트레이드 시키지 말아 달라고 당부 드렸죠.
최= 그런데 구단경영이 원래 비즈니스라, 그 요구가 제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당시 한대화 선수에게 “LG가 절대 트레이드 안 시킨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제 나이 서른여덟에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최= 당시 쌍방울 김성근감독이 정말 끈질기게 한대화를 원했습니다. 1996년 12월15일일 겁니다. 그때 단장회의랑 사장회의랑 양쪽에서 조찬모임이 있었는데, 쌍방울 단장이 저한테 또 한대화 트레이드를 청하셨죠. 당시 상당한 유망주였던 투수 신영균을 내주면서……. 한대화 선수한테 해준 약속이 있어서 일단 두고 보자고 거절했는데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기자한테 전화가 온 겁니다. 보도자료가 들어왔다고. 강정환 사장(당시 LG)도 사장 모임에서 당시 쌍방울 사장에게 트레이드 제의를 받았는데 “상의해보겠다” 정도로 답했던 걸 저쪽 사장께서 발표로 밀어붙이셨던 거죠. LG 입장에선 뭐 떠밀려 트레이드를 한 건데 사실 구단 내부적으로는 선수 한대화의 역할에 한계를 판단했던 시점이었습니다.
한= 그때 배신감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야구 그만둘까 생각도 했는데 마지막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갔죠.
최= 어떻게 변명해도 결국 무척 미안했던 일입니다. 약속 파기가 맞죠. 사실 저희가 바로 응징을 당했습니다. 직후인 1997년 개막전을 하러 전주 갔는데 제 기억으론 2연패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한= 저한테 홈런 맞고요. 뭐 이 악물고 쳤던 건 아닙니다.
최= 그런데 막상 쌍방울이 그렇게 원해서 데려갔는데 그 해에 은퇴를 시켰죠?
한= 사실 그때 제가 트레이드로 데려갈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선수 수명으로 은퇴 시기가 얼마 안 남았고요. 그리고 96년에 이미 LG에서 3루를 안 봤습니다. 지명타자로만 나가고 있었는데, 쌍방울 갔더니 수비를 원하시더라고요. 젊은 투수 내주고 데려와서 저한테 기대하는 게 많았을 수 있는데……. 몇 경기 해봤는데 도저히 수비가 안 되더라고요. 6월에 2군에 내려갔고 9월 확장 엔트리 때 못 올라오면서 결국 은퇴했습니다.
↑ 최종준 위원은 LG 단장 시절에서 "해결사" 한대화를 해태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왔지만, 결국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쌍방울로 트레이드 보냈다. 사진=천정환 기자 |
최= 선수 유니폼을 입고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팀은 결국 감독이 되어서 가셨죠. 2009년 말 한화 감독에 취임해서 이후 3시즌을 치르셨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있으시죠?
한= 그때 목표는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팀을 만들러 들어갔습니다. 워낙 전력이 많이 빠져서 힘들었던 때에 맡았습니다. 당해 시즌의 성적에는 욕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3년 계약하고 길게 전력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젊은 선수들은 미리 군대도 많이 보냈고요. 선수 보강을 위해 사실 그때 트레이드도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대 팀마다 원하는 카드가 제가 키워야하는 젊은 선수들이니 이게 될 수가 없죠. 이래저래 힘은 좀 들었습니다.
최= 결과적으로는 성적부진으로 경질됐으니까 구단과 꼭 같은 마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한=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저한테 팀을 맡길 때 워낙 선수가 없고 전력이 약했던 것은 구단도 잘 알고 있어서 외국인선수는 확실하게 투자해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이범호(KIA)가 소프트뱅크에서 돌아올 때는 꼭 잡아주겠다고 했고요. 두 약속 다 잘 안됐습니다. (웃음)
최= 요즘도 한화 경기를 관심 있게 보시지요? 한화가 최근 2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있는 팀인데 많은 생각이 들겠습니다. ‘야왕’ 한대화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소리도 종종 나오던데요?
한= 고마운 말씀이긴 한데, 그 때랑 지금이랑 팀 사정도 많이 다르고 저는 뭐 특별히 할 말은 없네요. (웃음)
최= 당장의 성과보다 긴 안목으로 노력을 많이 했던 감독이라는 걸 알아주신 팬들이 늘어난 거겠죠.
한= 그때 제가 어떤 마음으로 류현진(LA 다저스)을 썼는지 지금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좋은 감독은 열정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팀에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과 애정은 다릅니다. 잘 해보겠다, 뭐를 이루겠다, 이런 의욕이나 열정만큼 팀을 아끼는 마음, 팀의 미래를 생각하는 애정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결국 경질되면서 감독 생활을 마쳤지만, 저는 사실 후회는 안 합니다. 그 때로 되돌아가더라도, 혹은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 않고요.
최= 좋은 말씀입니다. 구단들이 감독이나 코치를 결정할 때 많은 생각과 고려를 하는데, 그 중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지도자로 임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가슴이 뜨거운 ‘애정’을 기대해서일 겁니다. ‘내가 그냥 일하고 지나 갈 구단이다’ 이런 느낌보다는 ‘우리 팀이다’라는 마음으로 팀의 장기적인 변화를 같이 꿈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죠.
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지도자들은 또 팀에 안주해서 안일해질 수도 있는데, ‘애정’은 잘 살리고 안일한 마음은 잘 경계하면서 후배들을 키워내는 게 중요할 겁니다. 한화 감독 시절 힘든 일도 많았지만 경기는 참 즐겁게 했습니다. 당장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매 경기 재미있게 뛰자고 선수들과 늘 얘기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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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이승민 기자 chicleo@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