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인천) 이상철 기자] KBO리그에 ‘올해의 재기’ 상이 있다면, 첫 후보는 배영수(36)가 될 것이다. 지난 2014년 12월, 한화 유니폼을 입은 배영수는 그에게 기대했던 독수리군단 에이스의 위용을 9번의 계절이 바뀌고서야 보여주고 있다.
한화에서 보내는 3번째 시즌. 지난 2시즌과는 180도 다르다. 32경기 4승 1패 1홀드 평균자책점 7.04의 투수는 4월 1달간 4경기 3승 평균자책점 2.95를 기록했다. 반전이다. 2012년(2승 평균자책점 2.66) 이후 가장 좋은 4월 페이스다.
하지만 놀랍지 않다. 배영수는 겨우내 이를 악물었고 그 노력의 결실을 조금씩 보고 있다. 스프링캠프부터 부활의 전주곡을 불렀다. 배영수는 “뭘 잘 하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배영수는 “부활, 재기 등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동료들, 김성근 감독님, 한화 팬에게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좋다”라며 활짝 웃었다.
↑ 배영수는 지난 4월 4일 대전 NC전에서 604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그가 올해 가장 설?��경기였다. 사진=김영구 기자 |
배영수는 달라졌다. 기록과 위치가 말해준다. 배영수는 4일 현재 3승으로 정우람과 함께 팀 내 최다 승 투수다. 비야누에바, 오간도 등 외국인선수를 제외하고 올해 1군에 한 차례라도 등판한 한화 투수 13명 중 유일하게 선발 등판만 하고 있다. 배영수는 2015년 21차례 선발 등판했지만 11번의 구원 등판도 있었다. 시즌 전 치열한 선발진 경쟁을 벌였던 그는 올해 오로지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선발투수만 느끼는 쾌감이 있다.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올라 심판의 ‘플레이 볼’ 선언과 함께 경기를 시작할 때의 긴장감은 배영수를 들뜨게 한다. 배영수는 “선발투수만의 긴장감이 있다. 직접 느끼지 않는다면 모를 것이다. 그 긴장감이 좋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배영수의 등장은 한화의 선발진 운영 고민을 덜게 했다. 정민태 투수코치는 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술’에 주목했다. 정 코치는 “(배)영수가 많이 바뀌었다”라고 운을 뗀 뒤 “그 동안 삼성 시절 썼던 구종만 가지고 임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 구종이 필요했다. 스프링캠프부터 준비를 정말 많이 하면서 스플리터와 체인지업을 추가했다. 구속이 빠르지 않으나 제구가 되고 구종이 다양해지니 좋은 투구를 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스탯티즈’에 따르면, 배영수는 올해 스플리터와 체인지업의 비율이 각각 13.3%와 9.5%다. 수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눈에 띄는 건 제구다. 지난 4월 27일 사직 롯데전의 경우 98구 중 스트라이크가 72개였다. 스트라이크 비율이 73.5%에 불과했다. 슬라이더의 감까지 되찾은 배영수는 “생각한 만큼 제구가 좋아지면서 더 잘 던질 수 있게 됐다”라고 했다. 제구 회복 비결을 묻자 그의 답변은 간결했다. “(열심히 연습하면서)공을 많이 던졌으니까 좋아진 거 아니겠나. 앞으로 제구가 더 좋아져야 한다.”
↑ 2017년은 배영수의 FA 계약 마지막 해이자 김성근 감독의 계약 마지막 해다. 사진=김영구 기자 |
배영수는 변화의 주된 이유를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마운드에 올라있을 때 매우 편하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 야구가 잘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배영수는 “부활, 재기라는 표현보다는 편하게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야구만 한다. 이것이 나에 대한 가장 올바른 표현 같다. 예전만 해도 ‘어떤 공을 던져야 할까’ ‘맞을까 안 맞을까’ 등 공 1개를 던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생각이 많았다. 지금은 달라졌다. 어차피 내 손에서 공이 떠난 뒤에는 내가 결과를 만들 수 없다. 그런 생각을 안 하니 심리적으로 편하다”라고 강조했다.
배영수는 한화 이적 후 보여준 게 없었다. 지난해에는 수술 후 재활 때문에 1군 1경기도 뛰지 못했다. 올해는 배영수의 FA 3년 계약의 마지막 해다. 지금껏 21억5000만원의 몸값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봄을 맞이하는 각오가 남다를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던 배영수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 해(2015년) 잘 할 수 있었는데 의욕만 앞섰다. 2년간 활약상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지난겨울 너무 타이트하게 보냈던 내 야구인생을 돌이켜봤다. 너무 타이트하게 살았던 것 같더라. 잘 안 풀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준비했다. 물론, FA 계약의 마지막 해라 중요한 해다. 나는 물론 팀과 감독님께도 의미 있는 해다. 그렇지만 이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더 보여줄 게 있나. (지금처럼 하던 대로)마음 편하게 야구를 할 따름이다.”
통산 431경기 1964이닝을 소화한 베테랑은 이제 여유가 묻어난다. 예민함도 사라졌다. 넘치는 것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이를 채워나가겠다는 자세다.
“훈련을 많이 한다고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중요하다. 힘겨운 과정을 1번, 2번, 3번 거치며 단단해진 면이 있다. 감독님 말씀대로 의식이 바뀐 것 같다. 예전 같으면 화부터 냈을 상황에도 ‘왜 그렇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표를 달고 행동한다. 과거에는 씩씩하게 승부했으나 지금은 너무 급하게 공격적으로 덤비지 않는다. 마운드 위에서 냉정해지려고 노력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하면서 좀 더 여유를 갖고 경기에 임한다. 이제야 뭔가 조금 보이는 것 같다.”
↑ 배영수는 최근 반칙투구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잘못된 투구 하나에 대해 인정했다. 그러나 그 하나 때문에 97번의 역투가 덮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
왁자지껄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배영수에게 빠트릴 수 없는 질문 하나를 했다. 그는 며칠 전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배영수는 지난 4월 27일 사직 롯데전에서 투구폼을 바꿔가며 타자의 타이밍을 뺏었다. 5⅓이닝 6탈삼진 1실점의 호투.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해 “교묘한 두뇌 피칭이 좋았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야구규칙을 어겼다는 주장이었다. 야구규칙의 8.01 정규의 투구 (a) 와인드업 포지션에는 ‘투수가 타자에 대한 투구와 관련된 동작을 일으켰다면 중단하거나 변경함이 없이 그 투구를 완료해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조원우 롯데 감독은 “명백한 반칙투구였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배영수는 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 우선 ‘잘못된 투구’였다는 걸 인정했다. 배영수는 “난 다소 즉흥적인 면이 있다. 연습할 때 하던 것이 마운드에서 생각나서 해보기도 한다”라며 “나중에 영상을 찾아 (처음부터 끝까지)봤다. (논란이 된 ‘한 장면’은)내가 봐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더라. 경기에 집중하느라 (그 사실을)몰랐다”라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고의성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외쳤다. 배영수는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다. 만약 고의성이 다분했다면 1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공 1개 때문에 다른 공(97개)을 다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반칙투구를)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날 물어뜯으니)솔직히 기분이 나빴다”라고 토로했다.
↑ 배영수는 야구를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잘 하는 게 야구다. 그래서 지금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게 더 없이 행복하다. 사진=김영구 기자 |
배영수에게는 최고의 4월이었다. 그러나 오래달리기의 초반일 따름이다. 앞으로 달려갈 거리가 더 많다. 그 역시 지나온 거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배영수는 “선발투수로서 팀 승리를 이끈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내 1승보다 내 하루가 더 소중하다. 내게는 그냥 4월이다. 그리고 이제 5월이 됐다. 새로운 시작이다. 지금은 그저 5월, 이 1달을 또 어떻게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할 따름이다”라고 전했다.
지난 3일 문학 SK전은 배영수의 5월 첫 경기였다. 그리고 반칙투구 논란 이후 첫 등판이었다. 배영수는 4이닝 동안 홈런 1개 포함 안타 8개를 맞고 5실점(4자책)을 했다. 6-0의 리드에도 대량 실점을 허용했다. 실투였다. 3회 한동민에게 던진 속구, 4회 나주환에게 던진 슬라이더 모두 높았다.
6-5로 앞선 5회 송창식과 교체됐다. 투구수는 81개. 아웃카운트 3개만 더 잡으면 4승도 가능했다. 배영수는 “실투는 곧 장타로 이어진다. 실투를 줄이려고 했는데 아쉽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전반적으로 제구가 높게 형성됐다. 그래도 실투 빼고는 괜찮았다. 선발승 욕심은 없었다. 무엇보다 팀이 이겼으니까 괜찮다”라고 말했다.
공교롭게 그가 등판한 5경기에서 한화는 모두 이겼다. 배영수가 조기 강판한 지난 4월 11일 대구 삼성전과 5월 3일 문학 SK전에서도 연장 혈투 끝에 웃은 쪽은 한화였다.
배영수도 그 이야기에 웃었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졌다. “5월의 첫 경기는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 경기 준비를 더 잘 해야겠다. 승리투수 조건 충족보다 더 오랫동안 공을 던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가야 한다. 무더운 여름도 곧 찾아온다.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도록 운동량도 조금씩 늘리고 있다.”
배영수는 여전히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KBO리그에서 30대 후반의 국내 선발투수는 점점 줄고 있는 가운데 그의 활약은 의미가 크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선발투수는 송승준(롯데), 윤성환(삼성) 정도다.
배영수는 “세대교체에 대한 말이 많지만 급진적인 교체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선후배가 잘 어우러져야 좋은 팀이 된다”라며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과 의지가 내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버텨내는 힘도 장점이지 않을까 싶다”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2000년 프로에 입문한 배영수는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팀 우승, 개인 수상 등 이룰 것도 다 이뤘다. 딱히 이룰 것도 없는데, ‘쿨가이’
“내 성격상 싫어하는 것은 때려죽어도 안 한다. 그렇지만 야구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마운드에 오르며 공을 던진다. 그것만으로도 난 매우 행복하다.”
[rok1954@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