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소년 가장 역할을 해야했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돌보는 일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쉽게 떨쳐내지 못한 지독한 가난속에서 맥도널드 매장직원, 웨이터 생활을 전전했다. 하지만 시골뜨기 고학생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그리고 결국 미국 의회 역사상 124년만에 처음으로 탄생한 40대 하원의장으로 선출됐다. 미국 권력서열 3위에 오르는 인생역전을 이뤄낸 것이다.
폴 데이비스 라이언(45) 위스콘신주 하원의원(공화당) 얘기다. 라이언 의원은 29일 미국 하원 총투표를 통해 제 62대 미국 하원의장으로 선출됐다. 1970년생인 라이언 의원은 위스콘신주 중서부 소도시 제인스빌에서 나고 자랐다. 가톨릭 집안의 4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성 마리아 중학교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조셉 크레이그 고등학교 입학후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언이 16세 되는 해에 당시 55세였던 부친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부터 급속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가 매디슨의 한 대학으로 출근을 하고 나면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정부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사회보장지원금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빠듯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라이언은 틈틈이 맥도날드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에 들어갈 학비를 모았다. 88년 오하이오주 옥스포드의 마이애미대학에 입학해서는 경제학과 정치학을 복수 전공했다. 졸업할 때까지 웨이터와 피트니스트레이너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라이언은 재학중 지도교수 리처드 하트 소개로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밥 카슨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를 계기로 청년 공화당원이 된 라이언은 우연한 기회에 전임 하원의장인 존 베이너 오하이오주 의원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이후 20여년만에 베이너 하원의장으로부터 의장직을 물려받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정치인으로서 라이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8년 고향인 위스콘신주 1번 선거구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이 되면서부터다. 이후 계속되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모두 55% 이상 과반수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해 젊은 나이임에도 현재 9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지난 2011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에 맞선 대응 연설을 하면서 공화당의 ‘오바마 저격수’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 러닝메이트(부통령)로 출마하면서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했다. 또 2013년 백악관과 공화당이 ‘오바마케어’ 폐지 여부를 예산안과 연계해 공방을 벌일 때 당내 강경파를 설득해 민주당과 합의안을 도출함으로써 연방정부 셧다운을 막아내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화당내 신망이 두터운데다 40대 하원의장이라는 기록까지 세우면서 라이언 의원은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로 탁월한 자격을 갖추게 됐다. 하원의장직을 무탈하게 수행한다면 차기 대선주자로서 충분하다는게 공화당내 지배적인 분위기다.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장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권력서열 3위 자리이므로 경력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반듯한 외모와 훤칠한 키 덕분에 라이언 신임 하원의장은 얼짱, 몸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 딸바보 아빠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일에는 워싱턴 DC 의회에서 일하고 주말은 반드시 위스콘신주 제인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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