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업체에 근무하는 이도영씨(29·가명)는 최근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 부탁으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씨는 ISA에 어떤 상품들이 담기는 지, 투자 위험은 없는 지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워낙 회사의 압박이 심하니 돈은 안 넣더라도 계좌만 만들어달라는 친구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시중은행에 최근 입사한 신입사원 김은비(27·가명)씨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다음달 출시되는 ISA를 1인당 200계좌씩 유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입사하자마자 주변에게 신용카드 가입부터 권유해야 했던 김씨는 더 이상 부탁할 만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음달 14일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ISA계좌 도입을 앞두고 금융권의 사전 가입자 유치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은행·증권사들은 값비싼 경품을 내걸거나 특판상품 가입권을 끼워주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ISA계좌에 담길 상품이나 수수료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 위험에 대한 안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불완전 판매’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ISA를 두고 은행과 증권사 간 치열한 사전 유치전이 펼쳐지면서 직원당 할당량을 강제 배분하는 사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시중은행에선 ISA 출시에 맞춰 영업지점별로 직원당 200계좌를 유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한 시중은행 직원은 이날 “지난 2009년에도 주택청약종합저축을 1인당 수백계좌씩 할당을 받아 상품에 대해서 설명할 겨를조차 없었다”며 “이젠 새 상품이 나오면 ‘또 누구를 가입시켜야 하나’ 하는 생각만 든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 대형증권사도 영업직원은 1인당 75계좌, 사무직원은 1인당 25계좌씩 ISA 할당량이 지난 18일 하달됐다. 직원들은 6월까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주요성과지표(KPI) 점수를 낮게 받아 승진 인사에서 누락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판매자격증이 없는 직원들이 지인들로부터 계좌개설에 관한 동의 서명만 받고 다니는 불법 아웃바운드 영업이 판을 치고 있고 금융감독원에선 이를 제재하기 위해 최근 조사까지 나설 정도다.
은행들은 직원들을 압박하는 한편 고액 경품을 내건 다양한 행사도 실시하고 있다. 200만원 상당 골드바(NH농협은행), 아반떼 자동차(신한은행) 등 추첨 경품을 내걸면서 사전 예약자 늘리기에 나섰다. 증권사들은 환매조건부채권(RP)을 무기로 내세웠다. 지난 15일 KDB대우증권이 ISA 사전예약 고객에게 연 5% 수익률을 주는 RP 우선매수권(인당 500만원 한도)을 약속한 가운데 22일 현대증권과 유진투자증권도 똑같은 혜택을 내걸었다.
문제는 정작 어떤 은행이나 증권사도 ISA 계좌에 담길 상품이나 수수료 구조가 어떤지에 대해 발표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경품이나 높은 환매조건부채권(RP) 수익률에 이끌려 사전가입을 하는 고객들은 정작 ISA 수수료나 포트폴리오 구조, 예상수익률 등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ISA에는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상품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원금손실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사전설명이 필요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1인당 의무적으로 수십~수백계좌를 판매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충분한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며 “고객들의 문의가 많지만 현재 줄 수 있는 답변은 소득에 따른 가입조건이나 절세 혜택 정도 뿐”이라고 밝혔다.
은행·증권사들은 새 먹거리 확보를 위해 어느 정도 수준의 고객 쟁탈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ISA 자체로 수수료 수익을 크게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상품 판매 등 연계영업을 위한 접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에게 일임형ISA가 허용됐다는 것은 은행도 향후 자산관리 시장에서 증권사들과 경쟁하게 됐다는 의미”라며 “이미 저금리 기조로 수익성이 한계에 달한 은행들 입장에선 ISA를 통해 새로운 사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제림 기자 / 정지성 기자 / 김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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