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 맘 때 중동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인기 작가 권기수(43)씨는 환한 표정이었다. 그가 탄생시킨 동구리 캐릭터처럼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동구리 인기가 중동 사막까지 뜨겁게 달굴 기세였기 때문이다. 서울 연남동 작업실인 ‘팩토리(factory)’에서 같이 작업하는 직원도 15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다소 수척하고 침울해 보였다. “국내에선 작품도 덜 팔리고, 직원도 절반 가량이나 내보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값은 계속 올려야 했어요.”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신작들은 복잡한 선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주인공 동구리를 감싸고 있다. 그간 발랄한 색과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던 정돈된 세계 대신 혼돈의 세계가 찾아온 것이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귀여운 얼굴의 동구리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캐릭터 ‘동구리‘는 동그란 얼굴에 머리털이 짤막하니 몇개 붙어 있고, 손발과 몸통이 단순화된 형태다. 올해 나이는 14살. “동구리가 사춘기를 맞이했어요. 자신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을 모색할 시기죠. 스스로 살아가려면 스무살 정도는 돼야겠죠.”
신작 20여점에선 직선보다는 곡선, 구상보다는 추상으로의 변모 가능성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 화단에서 선호하는 그림이 바뀌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그간 젊은 작가들의 재기발랄한 팝아트 작품들이 꾸준히 인기를 끌었으나 최근 단색화가 부상하면서 팝아트 퇴조론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권기수 신작 역시 추상으로 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 더러 있다. 작품명 ‘무(無)’(227.3x181.8cm)라는 2014년작에서 작가는 검은색 바탕 속에 일직선 굵은 선들을 배열시키고 배경이 되는 풍경들을 물 아래 밀어넣었다.
전시 제목 ‘후소’(後素)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 한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줄임말. “기존 작업을 바탕에 깔고 그것을 지우는 과정을 거쳤어요
사춘기를 맞은 동구리가 어떻게 어른이 될 지 지켜볼 일이다. 전시는 23일까지. (02)726~4456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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