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느렸다. 구도승은 1시간 동안 긴 잠을 자고 깨어나 또 1시간 동안 초저속으로 걸어 다녔다. 그사이 목탄 드로잉 전문 아티스트들이 무대가 되는 넓은 흰종이 위에 거미들을 그렸다가 전체를 검게 칠하고 다시 새 종이에 의미없는 선들을 그리는 지루한 작업을 되풀이한다. 세상은 점점 속도를 요구하고 현대인의 모든 번민은 번잡함에서 비롯된다. 구도는 속도의 제약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지난 4일 저녁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기념작으로 예술극장에서 첫 공연된 ‘당나라 승려’는 속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다.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대만의 거장 영화감독 차이밍량의 작품이다. 대표작인 영화 ‘애정만세’의 엔딩씬에서 여자 우는 장면만 6분 이상 보여줬던 감독이다. 의자도 발을 펴기조차 힘들어 고통스러웠다. 김선희 예술감독은 “관객에게 수도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하려는 컨셉”이라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이 공연에 열광했다. 마리에타 피켄브록 베를린 복스뷔네 차기 프로그램 디렉터는 “예술극장의 태도와 방향성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진술”이라고 극찬했다. 4~5일 이틀간 2회 공연 총 400석 가운데 450명이 입장했다.
“과연 광주가 아시아의 문화중심이 될 수 있을까”라는 모두의 염려 속에 지난 4일 부분적으로 문을 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지난 2006년부터 10년간 8000억원에 달하는 정부 예산을 쏟아부어 규모면에서 단연 국내 최대 복합문화시설로 지어졌다. 그런만큼 광주라는 지방에서 이 거대 시설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도 컸던게 사실이다. 개관 첫날 공개된 컨텐츠들은 이런 그간의 걱정을 불식시킬만 했다.
전체 16만1000㎡ 면적에 민주평화교류원, 문화정보원, 어린이문화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등 5개 원이 들어섰다. 전당은 서구 예술에 대한 단순한 모방을 탈피해 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적 발명과 가치관을 주체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전시·공연·정보집적·창작준비로 분주했다.
‘민주의 성지’인 옛 전남도청을 개·보수 중인 민주평화교류원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은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민주·인권·평화의 정신에 바탕을 둔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올해 11월 중순 공사가 끝날 예정인 민주평화교류원은 식민지 지배로 많은 부분 사장된 아시아 문화의 가치관과 잠재력을 주체적인 아시아의 시각으로 재창조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전당측은 내년 상반기 안에 전시콘텐츠 준비를 끝내고 정식으로 개원키로 했다.
어린이문화원은 어린이의 창의성과 문화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넓히겠다는 아시아 미래세대 양성에 기반을 둔다. ‘놀이로 만나는 아시아’, ‘국기로 상상하는 아시아’, ‘이야기로 펼치는 아시아’ 등 아시아 문화를 고루 체험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어린이문화원은 오는 12일까지 어린이공연문화축제 기간으로 정하고 전당을 비롯한 광주 문화예술시설에서 11개국 41개 공연을 206차례 펼친다. 이 중 1952년 창립된 일본 최초의 그림자 전문 극단 ‘카카시좌’가 꾸민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인 ‘핸드 섀도 판타지’는 전석 매진됐다.
문화정보원은 아시아문화의 과거를 14개 매체별로 집적·융합한 곳이다. 현재 소장 도서와 콘텐츠는 1만5000∼2만권으로 앞으로 10만권 소장이 목표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LP나 비디오테이프 등 원본 콘텐츠를 수집해 디지털화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서양문화의 대안을 제시하는 예술극장은 1120석의 가변형 대극장과 512석의 중극장으로 나뉜다. 가로 33m, 세로 20m의 대형 문에 비행기 격납고를 연상시키는 가변형 다목적 극장은 무대와 객석을 다양한 구조로 연출할수 있게 설계됐다. 예술극장은 29명의 아시아 작가들이 제작한 총 33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문화창조원은 랩(LAB) 기반의 창·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여기서 만들어진 콘텐츠를 6개의 전시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다. 아시아문화를 창작·구현·전시하는 장소다. 창조원 복합 1·2·3관은 올해 11월 말 개관 예정이다. 이날 복합 4관에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시아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 전시가
방선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 직무대리는 “상업적이 아닌 동시대 예술에 특화했지만 거의 대부분 공연이 매진돼 성공적”이라면서 “전당의 모든 공간은 완벽하게 만들어진 주문제작형 콘텐츠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콘텐츠를 만들어가서 보여주는 문화공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광주 =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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