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보편적인가. 아니, 그렇지만은 않다. 낯선 변방에서 풍문으로 들려오는 익명의 죽음과 내 눈앞의 죽음이 결코 같을 수만은 없다. 하물며 내 엄마의 죽음이란.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그것도 나의 엄마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의 애끊는 심경을 상상할 때, “우리 모두 어차피 죽는다”는 말은 기만이다. 사실, 죽음이란 보편의 더께를 한꺼풀 벗겨내면, 그 안엔 개별적인 죽음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9일 개봉하는 영화 ‘사일런트 하트’는 엄마 에스더(기타 노비)의 죽음을 앞두고 틀어졌던 가족 관계가 서서히 복원되는 과정을 다뤘다. 유럽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손꼽히는 빌 어거스트가 연출했다. ‘정복자 펠레’(1987)와 ‘최선의 의도’(1992)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회 수상한 그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흡입력게 이끌어가기로 정평난 거장이다.
내일이면 영영 온기도 느끼지 못할 엄마와의 이별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런 감독의 특성이 오롯이 반영됐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하룻나절 벌어지는 일들은 언뜻 단조로운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각 인물에 부여된 역할과 상황이 영화 전개의 긴장감을 더한다. 그 안에 가족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밀도 있게 담겨있다.
죽음을 다루지만 죽음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임종을 목전에 둔 에스더를 둘러싸고 이 영화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감독의 말마따나 초점은 관계다.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이 작품 속에 자신을 대입해볼 여지를 남겨두고, 실제로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게 나의 목표였다.”
장녀 하이디(파프리카 스틴)와 둘째 딸 산느(다니카 쿠르시크)는 엄마를 떠나 보낼 마음의 채비를 하고 왔지만, 막상 그 엄마를 보니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다. 그 슬픔을 간신히 억누른 채 엄마의 바람대로 산책을 하고, 만찬도 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 자연스레 각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내가 에스더 가족의 일원이라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관객은 이들 가족의 특수한 상황이 결국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다. 죽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진 오로지 본인의 선택과 직결된 문제다.
에스더가 선택한 존엄사는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 빌 어거스트는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런 병을 수반한 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논의되어야 될 중요한 쟁점”이라고 했다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존재들을 비난하고 경멸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음을, 다만 그 죽음의 찬반을 떠나 그러한 선택을 존중할 권리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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